그는 연꽃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심연으로부터 꽃이 피어나는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일까? 이어지는 이미지로 미루어 그가 보는 것은 심리적·정신적 꽃이다. 그는 꽃을 바라보며 꽃의 향기나 빛깔이 아닌, 꽃의 아름다움이나 아름다움의 미래가 아닌, 꽃이 피어나고 있는 물의 자리에 내려앉고 싶다고 한다.
왜일까?
그런가 하면 물 속으로 더 깊이 가라앉아 꽃의 뿌리에 닿고 싶어 한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상상력의 소유자를 만난다. 나 역시 꽃의 뿌리, 풀의 뿌리, 인간의 뿌리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길을 가다가도 숲을 거닐다가도 뿌리가 뽑힌 나무를 볼 때면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문득 태풍에 뿌리 뽑혀 쓰러진 아름드리나무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튼튼한 나뭇가지 이상으로 튼실한 뿌리가 땅 속에서 자라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아니었다. 나무를 키워온 뿌리라는 형상이 턱없이 왜소해 충격적이었다. 뿌리 있다고 믿었던 나의 존재가 늘 불안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나도 그 순간부터 지금껏 뿌리에다 무게 중심을 놓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꽃의 뿌리에 닿고 싶어 하는 이 시인의 뿌리는 또 어떤 것일까? 그의 뿌리는 왜 깊은 물밑에 있는 것일까? 그의 의식은, 상상력은, 꽃의 뿌리로 내려가고 있지만 막상 그 세계에 자신이 흡수되는 순간부터 다시 이 땅으로 솟아오르고 싶어 아플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많은 뿌리가 이곳으로 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로 보아 그는 인간의 본성이 아름답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그가 꿈꾸는 뿌리는 수만의 꽃송이와 풍부한 향기를 머금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한없이 깊고 유연해져야 닿을 수 있는, 정신을 채우고 있는 무거운 자물쇠 같은 욕망을 끊어내 버려야만 부단히 흘러가 닿을 수 있는, 그 뿌리 속에는.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놓여 있는 이 시를 그는 자신의 출발점이자 서시처럼 읽히기를 의도한 듯하다. 부디 그가 본디 있던 자리에도 시의 정신이 은류(隱流)하길.
조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