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제(金滿堤) 의원은 1971년 3월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임명장을 받는다. 직함은 거창했지만 막막했다. 연구원이 단 한 명도 없는 원장이었기 때문이었다.
KDI가 세계적인 국책연구기관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연구인력 확보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했다. 하지만 37세라는 젊은 나이의 그에게 이렇다할 ‘인재 풀(pool)’이 있을 리 없었다.
김 원장은 그해 5월 미국으로 직접 날아가 주요 도시를 돌며 인재 스카우트에 나섰다.
이렇게 끌어 모은 KDI 초기 멤버에는 박영철(朴英哲)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구본호(具本湖) 전 울산대 총장, 사공일(司空壹) 전 재무부 장관, 송병락(宋丙洛) 홍원탁(洪元卓) 서울대 교수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이 주축이 된 KDI는 고도성장기의 경제개발 논리와 정책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관계(官界)와 학계에 수많은 인재를 공급했다. 김 원장의 스카우트는 성공작이었던 셈.
스카우트 비결은 무엇일까. 김 의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주로 원로 교수들에게 추천을 받았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인사 청탁과 인사 추천을 동일시하는데 사실은 크게 다릅니다. 보스에 대한 충성심을 중시하기 때문에 학연 지연 혈연 등 각종 ‘연(緣)’에 따라 인사가 휘둘립니다. 능력도 없는 사람을 단지 학교나 고향 후배라는 이유로 중용(重用)하면 무리와 반발이 따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쓴다는 원칙을 세워 놓으면 인사 추천은 훌륭한 인재등용시스템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추천받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김 의원이 인사추천 예찬론자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
94년 3월 8일 포항제철 주주총회에서 김만제 회장이 취임하자 세간의 관심사는 사장과 핵심 임원에 대한 인사로 옮겨 간다.
정명식(丁明植) 전 회장과 조말수(趙末守) 전 사장의 표면상 경질 이유가 인사를 둘러싼 내분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정 회장과 조 사장의 라인은 깨끗이 ‘청소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주총이 끝나자마자 정 회장과 조 사장을 따로 만난다. 사장과 주요 임원을 추천받기 위해서였다.
이틀 뒤 발표된 포철 인사에서 사장에는 김종진(金鍾振) 부사장이, 기획조정실장 겸 부사장에는 조관행(趙寬行) 전무가 임명된다. 김 부사장은 정 회장과 조 사장이 공통으로 추천했고 조 전무는 조 사장이 적극 천거한 인물이었다.
물론 김 의원이 아무런 인재 감별 기준 없이 특정인의 추천만 믿고 인사를 했던 것은 아니다.
“관상을 본다거나, 눈을 본다거나, 말솜씨를 보는 등 사람마다 나름대로 인재를 감별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제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이력서입니다. 특정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사람이라면 이력서 안에 모든 평가자료가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김 의원은 인사 추천을 흔쾌히 받아들일 뿐 아니라 추천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는 서강대 교수 시절인 69년 3월 서울대 C교수에게서 “행정고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잠재능력도 뛰어난 청년이 있으니 김 교수가 경제기획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가 이런 부탁을 받은 이유는 경제기획원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깊숙이 간여해 관료들과 교분이 두터웠기 때문.
김 의원은 C교수의 학문이나 인품을 존경하던 터라 두말없이 이희일(李熺逸·전 동력자원부 장관) 경제기획국장을 만나 그 청년을 적극 추천했다.
그 청년은 경제기획원 종합기획과에서 공직생활의 첫발을 내디뎠고 나중에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 KDI원장을 거쳐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다. 강봉균(康奉均·민주당) 의원이 바로 그 청년이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