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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그림이란…” 국내전시회 연 獨 거장 3인은 말한다

입력 | 2003-06-10 18:00:00


《‘회화란 무엇인가.’ 독일 현대 회화를 대표하는 세 명의 거장의 작품이 전시된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전시장을 둘러보면 회화라는 고유 영역의 본질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받는 듯하다. 이 전시장에서 22일까지 초대전을 갖는 게르하르트 리히터(71), 고타르트 그라우브너(73), 이미 크뇌벨(63)은 평생을 ‘빛’과 ‘공간’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오로지 ‘붓질’을 통한 화면에 매달려 온 거장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그동안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미술’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깊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

리히터는 지난해 세계 경매시장에서 100여점이 거래돼 판매금액만 2760만달러(약 330억원)를 기록한 인기작가. 생존 작가로는 유일하게 베스트셀링 ‘탑10’에 꼽히는 인물이다.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영예의 황금 사자상을 받았으며 지난해 초에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그는 구상과 추상, 리얼리즘과 형식주의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시대와 장르의 경계를 무력하게 만들고 서로 대립적으로 이해됐던 미술적 요소들을 하나로 융합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초기 대표작들은 무질서한 붓 자국이 강하게 드러나는 추상그림들. 이번 전시에 선보인 ‘Vermalung (덧칠) 325’ (1972)는 오로지 브라운 색깔 하나로 붓질의 힘과 제스처의 강약을 통해 화면을 구성했다. 추상화에서 단색조 회화로 변하는 출발점인 작품이어서 회화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리히터는 1970년대를 전후해 미국 팝 아트에 눈길을 돌리면서 삶과 미술을 통합하려는 새로운 분위기에 매료됐다. 그래서 착상한 것이 회화와 사진의 화합.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을 다시 사진으로 찍는다든지, 아예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사진회화’라는 독특한 영역을 일궜다.

이번 전시에 등장한 ‘할리팍스’(1978)는 자신의 추상화를 128컷의 사진으로 찍은 작품이다. 똑같은 화면을 찍었는데도 음영과 농담이 다르게 나타나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표작이다. 이 밖에 실내와 풍경, 인물사진 위에 물감덩어리를 자신의 추상그림처럼 ‘덧바른’ 작품들이 선보인다. 리히터의 작품은 7월2∼31일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라우브너와 크뇌벨, 두 화가도 ‘장르 확대와 영역 파괴’라는 소란함을 뒤로한 채 색채의 전달이라는 자기 세계를 파고들었다. 2층 전시장에 걸린 그라우브너의 작품은 캔버스에 스펀지를 넣어 방석처럼 만든 것이 특징. 스펀지가 색을 빨아들이고 내뱉는 효과를 천에 자연스럽게 나타낸 작품은 단지 시각만이 아닌 촉각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때로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를 연상시켜 에로틱한 분위기까지 자아내 그의 작품은 ‘색채 신체’라고도 불린다.

그라우브너의 화면이 따뜻하고 감성적이라면 크뇌벨의 화면은 차갑고 이성적이다. 그의 캔버스는 알루미늄판이다.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의 모노크롬 화면에 간간이 보이는 붓자국은 디지털적 차가움에 아날로그적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크뇌벨은 캔버스를 여러 겹 겹쳐서 두껍게 만들거나 사각형 캔버스 가장자리나 중앙에 세로 가로 막대를 엇갈리게 하는 등 캔버스를 조각처럼 만들어 활용했다. 지난달 23일 개막한 이번 전시는 평일 하루 150여명, 주말 400여명이 찾아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14일 오후 2시 전시 설명회(고려대 강사 송남실)도 열린다. 입장료 일반 3000원, 초중고교생 2000원. 02-734-6111∼4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