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처음 들으면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투성이다. ‘등신외교’라는 말도 그랬다. 설마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뜻의 ‘등신’은 아니겠지 했다. 한자로 그럴듯한 다른 뜻이 있겠지, 등신(等身)이라면 ‘등신불(等身佛)’에서처럼 뭔가 제 키와 같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등거리 외교의 새로운 표현일 수도 있겠다’고 애써 생각해봤다. 물론 아니었다. 그 ‘등신’은 여전히 ‘바보’라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가지도자’라는 전제가 와르르 ▼
이 표현의 당사자는 “정치적 수사였다”고 해명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수사의 세계가 깊고도 넓은 데다 정치의 세계도 복잡하니 정치적 수사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수사(修辭)’란 말 뜻 그대로 뭔가 본질을 에워싼 껍질의 화려함이 요체다. 이렇게 벌겋게 속살이 드러난 말을 과연 ‘수사’라고 할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여당에서는 여기에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 ‘망언’이라는 말로 맞서고 있다. 주로 일본 정치인들을 겨냥해 애용되어 왔던 ‘망언’이라는 말을 마침 대통령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날, 야당 국회의원들이 듣게 되다니,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종래의 망언 당사자들을 염두에 둔 ‘정치적 수사’가 망언 소리를 듣게 된 형국이다. 그런 면에서 망언이라는 말도 적절한 단어라고 할 수 없다.
야당과 여당이 주고받은 몇 마디 말이 시사하는 문제는 적지 않다. 국가 최고의결기관으로서 품위를 상실한 것은 차라리 경미한 문제다. 품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었다. 대화의 맞상대가 서로 수위(水位)가 다른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의사소통에 실패했고, 나라의 수장을 한껏 깎아내림으로써 우리 모두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등신’이 이끄는 나라의 국회의원이라면 얼마나 한심할 것이며, 그 나라 국민은 오죽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를 지탱해오던 또 하나의 전제가 무너졌다. 국가의 지도자는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사회적 전제에 먼저 금을 낸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었다. 취임 초기부터 코드가 맞는 상대를 우대하는 듯한 일련의 말과 행동으로 대통령이 모든 국민의 지도자라는 전제를 무시했고,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기상천외한 말로 막중한 책임감을 감수해야 하는 미덕을 저버렸다. 어버이날 난데없는 ‘잡초론’을 편 것도, 화물연대 파업문제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둘러싼 교육문제에서 관련 장관들이 우왕좌왕한 것도, 국회 연설에서 언론에 대해 피해의식을 드러낸 것도 국가의 수장에 대한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노 대통령을 처음 미국에 보내 놓고 “혹시 엉뚱한 말로 국익을 해치지는 않을까” 염려한 국민이 많았다는 걸 그는 알까. 대통령이 돌아왔을 때 찬반은 엇갈렸지만 그래도 대미 외교성과를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그런 우려가 우려로 그친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을 뿐이다. 실제 그가 미국에서 얻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사람들은 안다.
힘 있는 사람 주변의 흔한 잡음을 놓고 “왜 나만 갖고 그래”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도, 기자회견장에서 신경질을 낸 것이나, 국빈 외교 전날 사신(私信)을 구술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것 모두가 조금씩 대통령이라는 전제를 스스로 허물어 온 사건들이다. ‘등신’이라는 말은 그러고 보면 ‘잡초’라는 말에 대한 뒤늦은 응수인 셈이다.
▼권위붕괴, 대통령 자초한 측면도 ▼
논리가 집이라면, 전제(前提)는 그 집이 서 있는 땅과 같다. 흔들리는 땅 위에 집을 지을 수 없듯이, 전제가 무너진 곳에 논리를 쌓으면 이내 허물어지고 만다. 대통령의 전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대통령이 무너진다는 것과 같다.
지도력의 전제는 권위와 도덕성, 전문성과 비전 같은 것들이다. 강한 지도력을 원한다면, 먼저 지도력의 전제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만 갈래로 부서져가는 각종 ‘전제들’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전제를 회복해야 토론도 가능하다. 지금은 토론할 때가 아니다. 무너진 전제를 회복하고, 분열된 합의를 땜질해야 할 때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