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소닉?…발음은 한 가지뿐인가요?…네이소닉?…문장에선 어떻게 쓰이죠?…네이소닉!…n,a,t,h,o,n,i,c.”
뉴욕 출신의 에베린 블랙락(14·여)이 한참 만에 단어의 철자를 또박또박 댔지만 ‘땡’하고 공이 울렸고 관중석에선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정답은 gnathonic(아첨하는). 앞에 묵음(默音) ‘g’가 있을 줄이야. 결선에서 제시되는 단어들은 웬만한 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출제자들이 참고하는 원전은 ‘웹스터 신국제사전’(3판·2002년).
블랙락양에 이어 마이크 앞에 선 텍사스 출신 사이 건투리(13). ‘라사이미아’라는 과제에 역시 한참을 끌다가 영어같이 생기지도 않은 ‘rhathymia(외향성의)’를 맞혔다. 블랙락양과는 하나 차이가 벌어졌고 이제 하나만 더 맞히면 우승이다. 마지막 과제는 ‘포코큐란티’. 문제를 제시하는 아나운서가 ‘무관심한’이라고 단어의 뜻을 설명하자 건투리군 얼굴엔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미소가 번졌다. 그는 마이크 앞으로 입을 내밀어 거침없이 ‘p,o,c,o,c,u,r,a,n,t,e’를 읊어대고는 타이거 우즈보다는 짧게 주먹을 흔들며 우승 세리머니를 했다. 이 대회 출전 네 번째 만에 우승한 그의 손에 쥐어진 상금은 1만2000달러(약 1440만원). 우승자에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악수할 기회가 주어진다.
5월 28, 29일 이틀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전국 스펠링 비(Spelling Bee)’ 경시대회의 풍경이다. 단어 문제를 푸느라 사력을 다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은 꾸밈없는 드라마다. 힌트를 되풀이해 물어보고 정답을 맞히기 위해 머리를 짜낼 때 그 긴장감은 현장의 학부모들은 물론이고 TV를 통해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이 대회는 1925년 켄터키주 루이스빌의 쿠리어 저널이라는 지방신문이 시작했다. 학생들이 스펠링 공부하는 것을 장려하자는 취지였다. 또 어휘 늘리기, 단어의 개념 익히기, 영어 표현 발전시키기를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첫 대회 참가자는 9명. 교육적으로 좋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다른 지방신문들도 경쟁적으로 비슷한 대회를 열게 됐다. 그해 9개 신문사가 참여하는 첫 전국대회가 개최됐을 정도로 시작부터 인기가 높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엔 열리지 않아 올해로 76회째다.
벌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한데 모여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사람들을 허스킹 비(husking bee)라고 불렀고 서로 도와 가며 사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애플 비(apple bee)라고 불렀다. ‘스펠링 비’는 학생들이 힘을 모아 단어를 하나하나 공부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다시 올해 ‘스펠링 비’ 대회 구경을 가 보자. 대회 출전은 8학년(한국의 중2)까지 가능하며 결선 날짜에 맞춰 16세 생일이 지나지 않아야 자격이 있다. 또 하나 의미있는 출전 조건은 ‘이 대회를 준비하느라 정상적인 학습과정을 빼먹은 학생은 안 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학습과정에는 ‘그 또래에 해야 할 공부와 과외활동은 다 포함된다’는 설명까지 달려 있다. 전국의 지방신문사 주최 대회에서 우승해 워싱턴에서 열린 결선대회에 참가 자격을 얻은 선수는 251명. 70∼80%가 12∼14세에 7, 8학년이었으며 가장 어린 선수는 8세였다. 결선 첫날 탈락하지 않고 둘째날 대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3분의 1인 84명.
마지막 날, 최고 인기 선수는 인도계 사미르 수디르 파텔이었다. 텍사스 출신인 파텔군은 아홉 살로 올해 결선 진출자 가운데 두 번째로 어린 학생이다. ‘수학박사’인 파텔군은 축구 농구 테니스 등 스포츠를 두루 좋아한다. 역사 고전 신화 등에 관한 책을 끼고 살며 피아노를 즐긴다. 한마디로 미국식 최고 우등생인 셈이다. 파텔군은 10문제를 전자게임하듯 아슬아슬하게, 그러면서도 차근차근 맞혀갔다. 테러민(theremin·러시아의 발명자 이름을 딴 전자악기) 네오솔로지(neossology·어린 새를 연구하는 학문)처럼 흔히 보기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관중석에서는 스타탄생의 기대감이 높아져갔다. 파텔군은 “처음엔 떨렸는데 마이크 앞에 서면 괜찮다”고 여유를 잡았다.
드디어 11라운드. 파텔군에게 주어진 문제는 ‘보덴’. 파텔군은 “나에겐 왜 프랑스어가 많이 걸리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한번 한 뒤 스펠링을 불러 나갔다. b,o,u,d,a,n,e.’ 결과는 ‘땡’. 정답은 ’boudin’(잘게 다지거나 양념을 많이 한 고기)였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파텔군을 향해 관중은 대회기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파텔군은 관중석에 있던 어머니 지요티의 품에 안겨 한동안 울다가 가족들의 격려에 겨우 눈물을 말렸다. 그는 내년에 또 무대에 설 것이다. 대회를 TV로 중계한 ESPN의 해설자는 “파텔군은 다시 도전할 것”이라고 예언처럼 말했다. 올해 대회로 네 번째 출전한 선수는 2명, 세 번째는 9명, 두 번째는 43명이나 된다. 어려서부터 도전할 만한 무엇을 갖고 산다는 것,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은 그들의 단어장만큼이나 풍성해질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파텔 성취학원 3학년’이라는 사미르 군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점. 그는 이른바 홈스쿨링으로 3학년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어머니가 파텔군의 교사로 각종 과목을 집에서 가르친다. 미국에선 교내 폭력, 사랑이 결핍된 교육방식 등을 꺼리는 부모들이 직접 자녀들을 지도하는 홈스쿨링 인구가 점차 늘어나 현재는 150만명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번 대회 결선 진출자 가운데 31명이 홈스쿨링 과정에 있다. 3년 전 73회 스펠링 비 대회 때는 홈스쿨 방식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1∼3위를 휩쓸기도 했다. 올해 대회에서 2위(여자부 1위)를 한 블랙락양도 집에서 8학년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펫을 잘 다뤄 여동생 샬럿과 함께 각종 이중주 무대에 서고 있다.
스펠링 비 결승 출제 문제연도단어뜻2003pococurante무관심한, 무관심한 사람2002prospicience전망하는 행위2001succedaneum대체품, 대체치료법2000demarche외교적 움직임1999logorrhea병적 다변증(多辯症)1998chiaroscurist색깔보다 명암을 중시하는 화가1997euonym(긍정적 의미의)딱 들어맞는 이름1996vivisepulture생매장1995xanthosis피부 황색증1994antediluvian대홍수 이전의, 시대에 뒤진 사람1993kamikaze2차대전 때 전함공격한 일본의 자살특공 조종사1992lyceum대중강연이나 음악회 등이 열리는 홀1991antipyretic해열제
홍권희기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