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 7년차인 회사원 홍순상씨(35·서울 관악구 봉천동)는 요즘 분통이 터진다. 외환위기 직후인 98년까지만 해도 그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3단지 15평형 아파트에서 전세로 신혼살림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더부살이 신세가 됐다.
살던 아파트단지에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집값이 급등하자 전세금도 덩달아 올라 4500만원이던 전세금이 1억원이 됐다. 1억7000만원이던 매매가는 5억원을 호가한다.
“전세금이 두 배나 뛰었으니 배겨낼 재간이 없지요.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샀으면 하는 후회뿐입니다.”
▼연재물 목록▼
- 증시 침체의 끝은 어디
- 지방금융이 무너진다
- 돈 혈맥이 막혔다
- 지방의 소비와 유통
- 벼랑에 선 노사관계
- 실업의 두 얼굴
- 투자 안하는 경제
- 벤처 희망은 없나
- 고비 맞은 중소기업
- 위기의 수출산업
▽찢기는 서민의 꿈=경기는 좋지 않다는데 집값만은 여전히 고공행진이다. 경남 창원시에 사는 정영수씨(생산직 근로자)는 최근 건설교통부 홈페이지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서울과 비교는 되지 않지만 창원의 집값도 최근 30%가량 오르면서 집을 사려면 20년 이상 저축해도 모자랄 판이다. 평생 일을 해도 세입자로 남고 노후도 불투명해졌다. 노동자가 된 것이 너무 서럽다는 생각이 든다.”
집값이 지역별로 양극화되면서 서울 강남에 진입하지 못한 일부 가장(家長)들은 ‘내가 무능한가’하는 자책에도 빠진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32평형 아파트에 사는 이모씨(39·회사원)는 요즘 집안에서 ‘말발’이 서지 않는다. 지난해 초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가자”는 부인의 요구를 묵살하고 눌러 앉았던 게 화근이다. 그 동네 아파트 값이 4억5000만원에서 최근 7억2000만원까지 오른 것. 그일 이후 집 매입을 포함한 모든 재테크 사항은 아내에게 전권이 넘어갔다. 이씨는 내년 초까지는 강남으로 이사하겠다는 아내의 계획에 따라 요즘 주말도 반납한 채 강남 일대를 뒤지고 다닌다.
투기 붐이 일면서 가정주부와 직장인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청약현장을 찾아다니며 ‘인생 역전’을 노리고 있다.
이달 초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서 분양한 주상복합아파트 ‘더 (노,로) 스타시티’(1179가구). 청약자가 무려 9만4000여명이 몰리고 청약신청금이 2조7000억원이 넘게 쌓여 화제가 됐던 곳이다. 이곳 청약 현장에는 대기업 사원 1년치 연봉인 3000만원을 청약금으로 예치해야 하는데도 젊은 직장인들이 적잖았다.
청약 현장에서 만난 이모씨(33·회사원)는 “직원들 10여명이 300만원 안팎을 각출해 청약금을 만들었다”며 “당첨만 되면 3000만원 이상의 웃돈이 보장된다는 말에 청약에 나섰다”고 말했다.
▽멍드는 국가경제=부동산가격 급등은 국가경제에도 주름을 만든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집값이 오르면 초기에는 소비증가와 내수활성화라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마다 정부가 슬금슬금 부동산을 자극하는 이유다. 하지만 6분기(1년6개월)가 지나는 시점부터는 ‘물가상승, 생계비부담 증가→소비위축, 임금인상 요구→노사갈등→기업활동 위축’이라는 악순환을 낳는다. 겉에 설탕을 발라놓은 독약인 셈이다.
국토연구원의 손경환((孫炅煥) 연구위원은 “2001년 하반기 이후 1년 동안 전국 집값이 17% 정도 상승했다”며 “이는 앞으로 소비자물가가 0.7%가량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이에 대비한 정부의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01년 초부터 계속된 집값 상승의 부정적 효과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대한주택공사 주택도시연구원의 이종권(李鍾權) 수임연구원은 “영국 등 선진국의 예를 볼 때 집값이 급등하면 집값 부담을 이기지 못한 근로자 계층의 지역 이동이 둔화되고, 이는 다시 지역별 노동력 수급불안 확대와 실업률 증가를 초래했다”며 “한국에서도 이 같은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훨씬 중요한 것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집 사야겠다’는 생각이 힘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근로의욕이 시들해지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커지는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한푼 두푼 절약해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가던 직장인들은 절망에 빠진다. 부동산 소유자와 비소유자 사이의 장벽도 점점 높아지면서 부동산 소유 계층과 비소유 계층이라는 새로운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공동체에 대한 신뢰까지 허물어진다.
황재성기자 jsonhng@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집값 상승 원인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집값 상승 요인은 △수급 불균형 △유동성 과잉 △정책 실패 △주거여건 차등화로 요약된다.
이 가운데 공급 부족은 외환위기가 가져온 결과로 지적된다. 1997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해 70만가구 이상이 새로 분양됐지만 이후 건설사 부도와 소비 심리 위축으로 30만가구 수준으로 줄어든 게 2000년 이후 입주 물량 감소로 이어졌다는 것.
실제 집값 상승의 진원지로 꼽히는 서울의 새 아파트는 99년 8만4503가구에서 2000년 7만3503가구, 2001년 5만6407가구로 급감했다. 서울 강남구도 99년 3386가구가 새로 입주했지만 2000년 1804가구, 2001년 1629가구로 줄었다.
시중자금이 넘쳐나는 것도 부동산시장을 과열시킨 주범으로 꼽힌다.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면서 은행권에 있던 시중자금이 부동산 외에는 뚜렷한 투자처를 찾지 못했다. 투기적 수요를 자극한 것. 특히 세계경기 침체 등으로 인해 주식시장이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부동산시장에서 소형 주상복합 등 투자형 상품이 쏟아진 것도 시장을 과열시킨 원인으로 평가된다.
정책 실패는 시장에 대한 무리한 개입을 뜻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2001년 이후 서울 강남권의 재건축아파트가 집값을 올리고 있다고 판단, 각종 제재조치를 쏟아 부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공급량 감소로 이어져 수급 불균형을 심화시킨 꼴이 됐다.
정책 혼선도 시장 불안정성을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분양권 전매의 경우 99년 자율화됐지만 올 들어서는 투기과열지구를 중심으로 전면 제한됐다. 청약 1순위 자격도 제한→해제→제한을 반복했다. 이러다 보니 소비자들이 정책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일단 사놓고 보자’식으로 투기화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지역간 주거여건 격차도 문제다. 정부와 서울시는 강남권 주택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 수도권에 신도시를 추가 조성하고 서울 강북을 ‘뉴타운’으로 재개발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강남을 대체할 수 있는 주거지가 마련될지는 의문이다.
풍부한 교육시설, 편리한 교통, 업무 중심지역으로 이동하기 좋은 높은 접근성 등 강남을 대변하는 특징을 일거에 확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새로 완공된 아파트 추이(단위:가구)지역1999년2000년2001년2002년2003년(추정)전체84,50373,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