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 오후 8시 KBS 1TV에서 방영되는 ‘역사스페셜’을 시청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우리 집 채널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아이들도 이 시간만큼은 내게 순순히 채널권을 양보하곤 했다.
‘고구려-당 전쟁, 안시성 싸움, 고구려는 어떻게 당을 이겼나’를 보면서 고구려 병사의 말발굽 소리를 듣는 것 같았고, ‘만주 독립운동의 거점, 신흥무관학교’를 볼 때는 애국청년들의 조국애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으며, ‘어느 임란포로의 비밀편지’를 보면서는 그 애틋한 사연에 눈시울을 적셨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역사스페셜’ 제작진의 노고에 늘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매달 통합공과금에 포함해 세금처럼 납부하는 시청료가 아까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 프로그램 하나 때문에 꼬박꼬박 시청료를 내곤 했다. 대통령이 일본 방문 중 과거 청산 문제를 일절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과 그 주변 참모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프로그램은 오래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KBS가 ‘역사스페셜’을 돌연 중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된다. 후속 프로그램으로 대통령의 최대 후원자 중 한 사람인 문성근씨가 진행을 맡는 ‘인물현대사’를 방영할 예정이라는 것도 석연치 않다. KBS는 ‘당연히’ 이 같은 해석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네티즌들은 ‘너무 속이 들여다보인다’는 반응이다. 특정 사관(史觀) 위주로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재해석 또는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물현대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인물들이 ‘현대사(現代史)’를 넘어 ‘당대사(當代史)’에 속한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프로그램을 하고 싶었다면 KBS 2TV를 통해 별도로 진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자신들의 공적을 미화하고 전 정권의 업적은 깎아내리는 식으로 근현대 교과서를 개정하려고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당시 학자들은 “한마디로 자신들의 업적과시에 조급함을 느낀 현 정부의 ‘치적 과시욕’과 근현대사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이나 검증 및 토론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일천한 역사성’ 등이 두루 작용한 결과”라고 풀이했었다.
70년대 초 미국과 중국 수교시 만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헨리 키신저가 대화를 나눌 당시 키신저가 수십년(Decade) 단위의 역사를 얘기할 때 저우는 몇 세기(Century) 단위의 역사를 얘기해 상대를 압도했던 사례가 있다. 현 집권층과 KBS 수뇌부는 ‘정권’을 단위로 역사를 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다음 정권에서 또다시 ‘새로 쓰는 인물현대사’가 방영될지도 모르겠다.
오명철기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