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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窓]신용카드 중독

입력 | 2003-06-15 17:34:00


가로 8.6cm, 세로 5.4cm의 플라스틱 카드에 무슨 마력(魔力)이 있는가.

요즘 끊임없이 발생하는 엽기적(獵奇的) 사건 뒤에는 으레 신용카드가 있다. ‘신용카드 중독증’이란 병이 있는지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용카드에 악마의 힘이 있다기보다는 한국인의 온갖 병리현상이 신용카드라는 ‘거울’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 거울에 가장 많이 비치는 것은 젊은이의 인격 미성숙인 듯하다.

올 초 필자가 20대의 45%가 인격장애로 의심된다는 서울대 의대 정신과의 연구 결과를 보도했을 때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는 이렇게 해석한 바 있다.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신용카드를 썼다가 돈을 갚아야 할 때 카드회사나 사회를 욕하거나 카드 빚을 갚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바로 인격장애자들이다.”

최근 제일기획이 발표한 ‘P세대 보고서’에 따르면 P세대는 옳고 그름보다 좋고 나쁨에 따라 행동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은 책임감 없이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십상이며 남에게 이용당하기도 쉽다. 일순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묘하게도 신용카드 남용자의 특성과 비슷하다.

신용카드 남용자 중 일부는 신용카드로 꾸준히 쇼핑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쇼핑중독자인데 이는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의존성 장애’ 또는 ‘충동 조절 장애’에 속한다.

그런데 인격장애자가 충동적 행동을 할 때나 쇼핑중독자가 충동적 쇼핑을 할 때 모두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정상적으로 분비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런 ‘세로토닌 분비 이상자’들은 사실 잘못된 양육의 결과물이다. 부모가 다른 사람의 가치와 사회규범을 존중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기죽지 않게끔 ‘오냐오냐’하고 키우면 아이는 결국 비수(匕首)를 부모에게 겨눌 인격장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

기성세대가 만든 폭력적인 문화도 충동성을 부추기고 있다.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우리 영화를 지키기 위해 ‘스크린 쿼터제’를 양보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 영화의 꼴이 어떤가. 폭력과 섹스로 얼룩진 대중문화는 인격 형성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다 수십 년간 지속된 결과지상주의, 물신화(物神化) 경향 등이 뒤섞여 충동성 장애자가 양산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최근의 사회현상이 정말 걱정스럽다. 외국에서 북핵(北核)에 대해 걱정해도 당사자인 우리는 ‘괜찮다’고 여기듯 아무도 우리 정신세계의 위기를 모른다는 점이 두렵다. 위기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조차 없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병을 고치는 운동을 벌일 때인 듯하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