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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영화감독 임권택

입력 | 2003-06-15 18:06:00

영화 ‘취화선’을 촬영 중인 임권택 감독이 장승업 역을 맡은 주연배우 최민식에게 연기주문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PL엔터테인먼트


2001년 겨울 영화 ‘취화선’의 경기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촬영현장. 조선 말엽의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은 몰락한 개화파 선비 김병문(안성기 분) 집의 담을 몰래 넘어가 자신이 그려준 수묵화를 채색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평생 자신을 채찍질한 예술적 후원자였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몰락한 김병문에 대한 장승업의 회한에 몰입하다보니 절로 눈물이 흘러나온 것. 대본에 없던 내용이었지만 명배우의 감동적 연기에 스태프들은 숨죽여 감탄했다. 그 순간 ‘컷’ 소리가 터졌다. 이 영화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게 되는 임권택(林權澤) 감독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거기서는 눈물을 흘리면 안 되지.”

그의 눈에도 최민식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배우의 연기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라는 큰 그림이었다.

“최민식은 대단한 배우요. 자신이 이해한 장승업에 투철하게 몰입한 거죠. 하지만 내가 그리고자 했던 장승업은 그렇게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은 아니에요. 세상만사 훌훌 털어버리는 탈속의 경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거기서 눈물을 흘려버리면 품격이 떨어져버리거든요. 그래서 감독은 배우의 연기에 취하면 안 되는 거요.”

영화감독 임권택에게 배우는 아무리 스타라 하더라도 전체 영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즉흥연기가 빛을 발하는 경우가 드문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평생 98편의 영화를 찍었다.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년)부터 ‘취화선’까지 40년간의 작품목록에서는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한다. 신영균(9편) 최무룡(6편) 신성일(11편) 하명중(2편) 이덕화(2편) 유인촌(2편) 안성기(6편), 그리고 최민식. 그뿐인가. 아시아의 대표 미인으로 꼽혔던 김지미(10편)와 60,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구축했던 문희(6편) 남정임(7편) 윤정희(4편), 2세대 트로이카 정윤희(3편), 월드스타 강수연(2편) 등.

그러나 임 감독의 추억의 서랍에는 이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텅 비어 있다. 믿어지지 않게도 그는 그들을 어떻게 캐스팅했고 어떻게 연기를 끌어냈는가를 대부분 기억해내지 못했다.

“한번은 집에서 TV를 보는데 내가 못 본 옛날 방화가 나오더라고요. 한참 보다보니 한번 본 것 같기도 한데 누군지 참 촌스럽게 만들었다고 혀를 찼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감독 이름이 나오는데 그게 내 이름입디다.”

그의 기억력은 컴퓨터의 램(RAM)을 연상시켰다. 새로 부팅이 되면 과거에 찍은 영화에 대한 기록은 깨끗이 지워지고 앞으로 찍을 영화에 대한 기록만 남는 식이다. 그러나 그가 집단창작품인 영화에서 자기 이름 석자로 기억되는 ‘작가’의 반열에 든 데는 바로 그런 뚜렷한 자의식이 큰 역할을 했을 터다.

그는 “캐스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의 연기력보다 이미지”라고 했다. 배역을 정할 때 관객의 입장이나 원작자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해석된 이미지에 투철했다는 것.

강수연에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씨받이’(1986년)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잠재된 끼나 연기력이 아니라 그녀의 이미지였다.

“17, 18세의 앳된 얼굴이면서 남들은 수십년간 겪을 인생의 질곡이 담긴 얼굴을 찾아야했어요. 말이 쉽지 그런 얼굴이 어디 있겠소.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던 그 이미지가 우연히 본 TV드라마에서 여고생으로 출연하던 강수연의 얼굴에 탁 꽂힌 거요.”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아다다’(1987년)의 신혜수, ‘서편제’(1993년)의 오정해, ‘춘향뎐’(2000년)의 이효정 등 그가 신인배우 기용에 과감했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주요 배역을 전원 신인으로 발탁한 ‘장군의 아들’(1990년)은 그가 배우 기용에서 얼마나 자신의 목표의식에 투철한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 김두한 역으로 발탁된 박상민은 우락부락한 기존 김두한의 인상과 달리 곱상했다.

“내가 김두한 실물을 본 사람인데 그걸 몰랐겠소. 하지만 내가 그 영화에 담고자 했던 것은 사실적인 전기가 아니었거든. 김두한이 뭐 그렇게 훌륭한 인생을 살았다고…. 내가 초점을 맞춘 것은 한국적 액션연기였어요. 그래서 대사는 성우들의 더빙으로 만들더라도 온몸을 던져 디테일한 액션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신인들을 기용한 거지.”(계속)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