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 시의 러시아어 번역판 출간을 기념하는 ‘한국 문학제’에 참가하게 되어 처음으로 러시아를 가보았다. 소설에서 자주 접했던 밋밋한 자작나무 수풀에서 웅장한 동궁(冬宮)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듣던 대로였다. 그러나 영화나 TV 화면을 통해 보았던 ‘붉은 광장’은 생각만큼 넓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만년을 보냈다는 집은 생각보다 호화로운 편이어서 문학의 물질적 기초란 것을 다시 생각했다. 이렇듯 처음 가보는 곳은 예상과의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러시아서 목격한 ‘초라한 삶’▼
그중에서도 러시아의 관문이라고 할 공항은 음산하고 초라했다. 자동차는 대체로 난폭 운전을 했고 호텔의 승강기는 고물인 탓인지 탑승자를 가끔 놀라게 했다. 공항에서나 매표구에서나 직원들의 동작이 굼떠 시간을 질질 끌었다. 현지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는 러시아에서는 매사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좋다고 설명해 주었다.
어디를 가나 보게 되는 고려인은 파란만장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카프카스에서 소연방 붕괴 후 모스크바로 왔다는 한 여성은 조부가 스탈린 시대에 총살됐다고 했다. 사할린에서 용케 유학 와 대학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에 근무했다는 노신사는 퇴직금으로 매달 2200루블을 받는다고 했다. 미화로 70달러 정도인데 붕괴 전에는 800달러 정도여서 살 만했다고 했다. 대학 교원의 봉급이 대체로 4000루블 안팎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실토다. 150달러 정도라는 얘기인데 경제적 곤궁은 짐작이 간다. 그런 맥락에서 가장 확실한 징후는 모스크바행 항공기 안에서 본 젊은 러시아 여성들이다. 300개 정도의 좌석이 꽉 찼는데 과반수가 러시아 여성들이었다. 대부분 서울 강남 유흥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이들이라 해서 놀랐다. 광대한 국토에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고 10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 초강국의 하나였던 나라의 꽃 같은 젊은이들이 자원은 빈약하고 인구 밀도만 높은 동강난 한반도로 벌이를 오다니! 러시아인의 입장에서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 호텔 바 앞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공격적으로 고객을 유인하고 있었다.
우리 쪽에서는 또 일본으로 많은 여성들이 돈 벌러 나가 있다. 150달러 받고 어떻게 사느냐고 동행한 젊은 후배는 궁금해 했다. 그러나 불과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우리 쪽 대학 교원의 봉급도 현재 러시아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40년 전에는 전 국토가 가도 가도 붉은 산인 절망의 터전이었다. 요즘 타도와 경멸의 대상처럼 일부에서 호칭하는 구세대들이 이나마 이룩한 것이다. 전 국민이 땀 흘려 일한 덕택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설명이 끝나지는 않는다. 북한의 동포들은 놀기만 일삼아 외부의 인도적 식량 지원을 요청하는 처지가 된 것일까.
특히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부터 과거의 전면적 부정이 하나의 풍조가 되어가고 있다.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구석이 없는 과거는 없다.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태반(胎盤)인 김대중 정부가 역대 정권에 비해 각별히 부패한 정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남달리 도덕성을 내세운 정권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정권 실세들의 비리는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었다. 김대중 정부는 언필칭 ‘외환위기 극복과 남북 긴장완화’를 치적으로 내세웠다. 과연 그럴까.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하에서 누가 정권을 맡았다 하더라도 시키는 대로 했을 터이고,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평가는 시기상조이긴 하다. 그러나 북핵 위기가 1991년의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공동선언’의 위배와 관련된 이상 현 시점에서 치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요란한 구호보다 경제 살리기를 ▼
앞 정권을 반면교사로 할 때 참여정부가 가야할 길은 자명하다. 과거의 전면적 부정이나 그와 연관된 독선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겸허한 태도로 비판적 지지자를 모으는 일이다. 남북 교류가 이루어진 것도 우리 쪽의 압도적인 경제적 우위 때문이다. 요란한 구호보다 실질적인 경제 살리기와 삶의 질 향상이 급선무다. 초강국의 몰락과 한 많은 고려인을 보면서 근접 과거의 전면적 부정이 얼마나 비(非)역사적인 태도인가 하는 것을 통감했다. 흥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망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