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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나무]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승효상

입력 | 2003-06-16 18:21:00


《미국 건축가협회 명예펠로, 국립현대미술관 선정 ‘올해의 작가’,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초청 대표작가.평생 하나만 누려도 영광이라는 세 가지 영예를 모두 한 해(2002)에 차지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인정받은 승효상 이로재(履露齋) 대표(51). 그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자신의 건축관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의 삶과 역사를 담아내는 건축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자네는 김수근한테 가게.”

서울대 건축학과 4학년 마지막 수업 시간에 고 김희춘 교수가 그에게 던진 말 한 마디에 그는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건축가 고 김수근의 ‘공간’(김수근설계사무소)으로 들어갔다. 군사독재와 데모로 얼룩졌던 시절이라 대학생활에는 별 애정이 없었지만 그래도 스승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줬다는 것이 내심 감격스러웠다.

사람들이 살면서 완성하는 ‘단순함’의 건축을 지향하는 승효상. 그의 사무실(이로재)은 내장마감재 없이 시멘트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김동주기자

졸업식도 하기 전인 1974년 12월부터 1989년까지 15년에 이르는 그의 ‘공간시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김수근은 가까이 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첫 인상부터 오만할 정도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승효상은 그곳에서 30여명의 사람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오로지 건축만을 위해 살았다. 그는 “숱한 대화와 토론을 거치며 김수근의 인정을 받거나 혹은 김수근을 극복하기 위해 거의 종교집단처럼 생활했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건축가로서의 자세를 배웠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하수인이나 시녀가 아니라 거대한 문화의 창조자라는 것, 그리고 건축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중요한 삶의 문화라는 것이었다.

1986년 김수근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유언에 따라 그는 ‘공간’을 지키며 ‘김수근 건축’을 이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김수근 없이 ‘김수근 건축’의 흉내만 낸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1989년 자신의 건축을 하기 위해 ‘공간’을 떠났다.

그는 지금도 한국적 건축의 규모에 대한 통찰, 건축 공간의 치밀한 구성 등 김수근에게 배운 것들을 중시한다. 그러나 김수근이 살았던 ‘개발의 시대’와 달리 새로운 시대는 건축에서도 새로운 가치를 요구했다. 군사독재 시대를 지나 민주화 시대를 맞고 있었고 이전의 무모한 개발을 반성하며 환경의 가치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공간’을 떠나왔지만 막상 홀로 세상에 나와 보니 막막했다. 무엇보다 ‘나의 건축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 당장 풀어야 할 과제였다.

김수근에게 배운 것 중 한 가지는 분명했다. 건축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건축주가 자신의 돈으로 집을 짓는다 해도 그는 사용권을 가질 뿐이고 건물은 사회 전체의 재산이다. 이를 위해 건축가는 건축이 가진 공공성을 지켜야 하며, 이런 점에서 건축주는 건축가의 지원자인 동시에 적이기도 했다.

그는 건축주에게 굴복하면 쉽게 먹고살 수 있겠지만 곧 하수인이나 시녀가 되어 결국 버림받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다. 힘들지만 건축주들이 이 ‘말 안 듣는’ 건축가를 인정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가진 재산은 없었지만 배고픔을 참고 견디는 것이야 이미 김수근의 ‘공간’에서 이력이 난 터였다.

그 사이에 그를 비롯한 조성용 민현식 김인철 등 건축가 12명이 모여 1990년 4월3일 ‘4·3그룹’을 만들었다. 건축계의 고질적 병폐인 출신학교의 벽을 넘어 비슷한 연배이면서도 다양한 취향을 가진 건축가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발표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아갔다. 승효상도 2년 동안 열심히 참여했고 함께 여행하며 세계 곳곳의 건축물을 둘러봤다. 1992년 ‘4·3그룹 전시회’에서 그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자신의 건축관을 발표했다.

이 무렵 건축주들이 그를 다시 찾기 시작했고 미술평론가 유홍준씨의 자택인 ‘수졸당’, 충남 당진의 성당인 ‘돌마루공소’, 서울의 ‘영동제일병원’ 등 그의 철학을 담은 건축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빈자의 미학’은 그가 그동안 공부하고 경험한 건축을 집약한 결실이었다. 그는 유신 반대와 한일회담 반대, 휴교령으로 얼룩진 대학시절에 미국문화원에서 건축 관련 책들을 찾아 읽으며 거의 혼자서 공부했다. 지크프리트 기디온의 ‘시간, 공간, 건축’을 읽으며 건축이 단지 기술이나 예술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임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유섭의 ‘한국미술문화사논총’을 발견했고, 한국문화의 가치를 명료하게 일깨워주는 이 책을 수없이 반복해 읽으며 한국의 전통과 한국인의 삶을 담은 건축을 꿈꾸게 됐다.

현실과 역사에 대한 자각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어준 것은 루카치의 리얼리즘이었다. 예술적 작업이 백지 위에서 창조된다는 주장은 모두 기만이고 허위라는 것이었다.

루카치는 현실의 예술이 기존 역사의 적층(積層)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줬다. 그에 따르면 기본적인 건축을 토대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게 다듬어나가는 건축, 그리고 그런 삶의 적층을 볼 수 있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었다.

그런 가변성을 많이 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한국의 전통적 건축에서 그는 좋은 건축의 요소를 많이 발견한다. 전통가옥의 마당과 같은 ‘불확정적 공간’이 바로 그런 공간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인들과 건축가들이 잊고 지내는 ‘비움’의 가치를 잘 보여준다.

르 코르뷔제, 루이스 칸, 루이스 바라간, 알베르토 자코메티, 리처드 세라 등 그가 좋아하는 건축가나 예술가들 역시 공통적으로 자기표현을 극도로 절제하고 억제하며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반물질적, 반물신주의적이다. 이들의 작품은 영웅적이진 않지만 절실한 긴장감 가운데 섬세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건축이다”고 말한다. ‘빈자의 미학’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달동네의 골목길이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의 달동네를 거의 섭렵하며 그곳에서 공간 활용을 배울 수 있었다.

달동네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사유의 공간보다 골목이나 작은 빈터 등 공공의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그가 자신의 건축을 찾아 고민하다 마침내 다다른 곳은, 바로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6·25전쟁 직후의 부산의 골목길과 그 시절 그를 키워준 기독교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모님과 교회에서 배웠던 칼뱅이즘의 절제와 검약, 개별적 공간을 구획지으면서도 공동의 삶을 이뤄나가는 피란민촌의 골목길이 ‘빈자의 미학’의 토대가 돼 주었다.

건축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는 건물의 벽들이 개인별 영역을 구획지을지라도 그 사이에 개인 영역을 이어주는 공공 영역이 많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 집을 짓기보다 기존의 집을 활용하고, 용도가 규정된 공간보다 사람들이 공간의 쓸모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건축을 지향한다.

건축은 삶과 역사가 축적된 것이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완성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건축은 단순할수록, 침묵할수록 좋다”고 말한다. 그래야 더 자유롭게 많은 삶들을 담아낼 수 있어서다.

그는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올해의 작가전’ 주제로 ‘Urban Void(도시의 비움)’를 내걸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담아내며 살아갈 수 있는 ‘비움’의 공간을 더 넓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경기 파주출판단지와 중국 베이징(北京) 장성주거단지를 조성하고 수도권 소도시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이상적 도시의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좋은 건축은 그 땅에 맞는 집을 짓는 것이다 ▼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토지를 점거해야 하는 건축은, 그 장소가 요구하는 특수한 조건들을 맞춰 줘야 한다. 기후와 지리 등의 자연적 조건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일궈낸 인문사회적 환경 속에서 조화롭게 세팅되고 알맞은 옷을 입을 때 이는 그 장소에 적확한 건축이 된다. …

토지는 그 규모에 관계없이 우리 인간의 삶 이전에 태어나 있었으며, 그 이후로 영겁의 세월을 지내 왔다. 그 세월 속에서 수없는 사연들이 담기고 또 지워졌을 것이며, 그러한 흔적의 축적은 형언키 어려울 만큼 엄청난 양으로 그 속에 용해돼 있다. …

따라서 장소성의 회복은 건축가로서 지켜야 할 토지에 대한 신성한 의무가 된다. 토지 속에 담겨진 흔적을 발견해 내는 것,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 또한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 이런 것들이 침묵하는 토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토지에 생명을 갖게 하며, 이에 비로소 그 장소성은 회복된다.

‘빈자의 미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