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의 묘미라면 뭐니뭐니해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아무래도 주변 차들에 신경 쓰느라 풍경 구경은 물 건너가게 마련이다. 특히 요즘 무궁화호의 창이 기존의 창보다 훨씬 넓게 설계되어 있어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침이면 아스라한 안개가 끼여 있는 신선한 풍광을, 저녁이면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는 신비한 모습을 즐길 수 있다. 콘크리트 벽에 갇혀 하루에 한 번도 제대로 하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자연의 신비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기차여행이기도 하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녹차의 주요 생산지인 전남 보성으로 여행일정을 잡았다. 국내 녹차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곳, 일단 통계상의 수치가 여행객의 구미를 돋운다. 동행자가 있다면 기차를 타고 가다 돌발퀴즈 하나를 내볼 만하다. ‘녹차나무는 겨울에도 푸를까? 아니면 여느 나무들처럼 휑한 가지만 있는 앙상한 모습일까?’ 사실 나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필자도 전에는 당연히(!) 녹차나무도 겨울에는 가지만 남는 줄 알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녹차나무는 사철나무에 속해 한겨울에도 그 푸른색을 그대로 유지한다.
서울에서 전남 보성으로 바로 가는 기차는 그리 많지 않다. 평일에는 하루 1회, 오전 8시35분 무궁화호뿐이다. 시간도 꽤 걸린다. 무려 5시간30분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시간과 맞먹는다. 그러나 너무 지루해할 필요는 없다. 매일매일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단 1분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이 ‘강박’과도 같은 일상에서의 탈출, 그것도 5시간3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기회란 그리 흔치 않다. 아마도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기차 시간에 맞추기가 어렵다면 광주까지 기차를 타고 가 광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보성으로 갈 수 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평일 기차 외에 오후 1시10분에 새마을호가 있고 금·토·일요일에는 오후 5시25분 무궁화호가 증편된다. 광주, 목포, 여수, 부산 지역에서는 새마을호 무궁화호가 하루 10여 차례 운행된다.
그런데 왜 하필 보성이 녹차의 주요 재배지가 됐을까. 일제시대인 1939년 일본의 녹차 전문가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녹차 재배에 적합한 기후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비옥한 마사토와 적당한 해풍, 많은 안개와 높은 습도라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최적의 녹차 재배지인 이곳 보성을 찾았다. 현재 이곳에서는 180만평의 넓은 지역에서 연간 200만t 규모의 녹차가 생산되고 있다.
녹차탕 체험, 쫄깃한 녹돈 최고 인기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녹차나무를 실컷 구경하려면 보성역에서 내린 후 버스를 타면 된다. 역 뒤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는 30~ 40분 간격으로 하루 24회 율포해수욕장행 버스가 있다. 약 10분만 가면 온 산을 양탄자처럼 덮고 있는 계단식 녹차 나무밭을 볼 수 있다. 녹차밭 운영자들은 군데군데 무료 시음장을 지어놓았다. 어느 곳에든 들어가면 밝은 미소와 함께 따끈한 녹차 한 잔을 대접받을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올해부터 녹차밭 사이사이에 벚나무를 심어놓았다는 사실이다. 군청에서 관광지 개발의 일환으로 시작한 사업이라고 한다. 평상시에는 벗나무가 심어진 곳이 꼭 흰색 나무막대기처럼 보인다. 푸르른 녹차밭에 화사한 분홍빛 벚나무.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율포해수욕장 백사장. 보성 녹차밭 운영자들이 만들어놓은 무료 시음장. 율포해수욕장 횟집의 농어회와 바지락회.(위 부터)
이곳 보성 사람들에게 녹차는 일상이다. 돼지고기와 녹차가 만난 ‘녹돈’이 있는가 하면 녹차양갱, 녹차아이스크림, 녹차김치 등 녹차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있다. 심지어 횟집에서도 녹차를 준다.
녹차밭을 실컷 구경했으면 율포해수욕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다시 버스를 타고 5분 정도만 가면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다. 이곳 보성 일대에서는 율포해수욕장이 가장 유명하다. 특히 일출은 일출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정동진보다 훨씬 낫다는 게 관광객들의 평이다. 이곳이 좋은 점은 일출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점에 횟집들이 늘어서 있다는 사실이다. 민박도 함께 하고 있어 아침에 방 안에서도 일출을 지켜볼 수 있다.
율포해수욕장 뒤편에는 보성군에서 직접 운영하는 ‘녹차 해수 온천탕’이 있다. 지하 120m에서 끌어올린 바닷물에다 하루 15kg 넘는 찻잎을 넣어 우려낸 ‘천연건강온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은은한 녹차 향이 코끝을 자극하고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주말에는 번호표를 들고 기다려야 할 정도. 전날의 숙취를 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온천이다. 또 녹차 온천은 특히 무좀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살균력이 뛰어난 녹차의 플리페놀 성분이 무좀균을 없애주기 때문이라고.
저녁식사로 고기를 먹고 싶다면 녹돈을 권하고 싶다. 찻잎을 사료에 섞어 사육한 녹돈은 돼지고기 특유의 노린내가 나지 않고 고기도 여간 부드럽지 않다. 게다가 콜레스테롤이 적고 중금속이나 니코틴 해독작용도 있다는 것이 녹돈 판매점 주인장의 자랑이다. 벌교 인근에서 잡히는 꼬막 맛도 기막히다. 꼬막은 예로부터 수라상에 8진미 가운데 1품으로 진상됐고 제사상에도 반드시 올려졌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감기 석 달에 입맛은 소태 같아도 꼬막 맛은 변치 않는다’고 말한다. 꼬막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봄철 직전까지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하니 지금이 제철인 셈이다.
겨울의 막바지, 푸른 녹차나무를 보고 상경하는 길은 왠지 마음이 설렌다. 또다시 푸른 청춘 같은 날을, 언제나 싱싱한 생활을 다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TIP ◇
율포 인근 횟집에서는 이런 먹을거리를 즐겨라
율포해수욕장 맞은편에는 10여개의 횟집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선 갓 잡은 생선은 물론, 싱싱한 피조개, 쭈꾸미, 낙지 등이 한 상에 모두 올라온다. 여러 횟집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싱싱 횟집’. 보성 토박이 박윤섭 사장이 운영하는 이곳은 가장 오래된 곳이기도 하거니와 바지락회로 유명하다. 지난 여름에도 바지락회를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피조개는 이름 그대로 선홍빛 피를 머금고 있다. 먹기는 영 꺼림칙하지만 그 피가 몸에 상당히 좋다고 한다. 어른들은 그 피를 ‘아낌없이’ 먹어치운다. ‘돈배젓’이라고 불리는 전어창젓의 맛은 일품. 제철에 잡힌 전어의 내장으로 만든 것인데, 겉모양은 멸치회 같지만 맛은 색다르다.
6인이 15만원 정도면 사각거릴 정도로 싱싱한 농어회와 바지락회 등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이곳 횟집의 또 다른 특징은 회에 딸려 나오는 음식이다. 서울에서는 보통 멍게나 생선, 각종 조림류가 나오지만 여기에서는 호두, 대추 등을 물엿과 버무려 내온다. 달콤한 물엿 맛과 생선회의 어울림이 이채롭다.
강은옥 dreamloc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