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공직사회에 개혁세력을 조직화하겠다고 해서 정계가 다시 들끓었다. 이런 발언에 함축된 정치적 의미는 크고 복잡하므로 그럴 만도 한 일이다. 나로서는 이 발언에 언급된 ‘국정철학’과 관련해 한마디 거들고 싶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가자.’ 이것이 이번 발언에서 대통령이 제시한 국정 목표다. 말하자면 몇몇 경제 전문가들에게서나 나오던 이 구호가 국민을 역사적 현실로 불러내는 공식적 호명(呼名)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개혁주체論’ 시대에 안맞아 ▼
과거를 돌아볼 때 소득 1만달러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을 산업화의 현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헝그리 정신’일 것이다. 한국인은 배고픔을 면하려는 일념에서 불행한 역사의 질곡도, 정치적 모순이나 사회적 부조리도 모두 잊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은 그런 망각이 가져온 신화였다. 산업화 시대는 어떤 망각의 시대, 그런 망각과 더불어 가능했던 맹목적 질주의 시대였다. 이런 질주의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앞으로 나아가긴 하는 것 같은데 그 속도는 더뎌졌고 때로 퇴행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변화는 옆 나라의 속도와 비교하면 훨씬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중국에 다녀온 사람은 밤낮 없이 부수고 건설하는 그 산업화의 현장에서 엄청난 헝그리 정신이 숨쉬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또 한국은 그와 유사했던 국면을 접고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야 할 갈림길에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분명 우리는 과거의 행보로는 ‘헝그리 정신 이후’를 내다보기는커녕 이제까지 걸어온 길도 마무리하지 못할 수 있고, 그런 마무리를 위해서라면 먼저 헝그리 정신 자체의 한계를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헝그리 정신으로 태어난 주체는 열심히 일할 수는 있지만, 내용적 성취욕 이외의 다른 감수성, 특히 형식적 감수성을 내면화하기 어렵다. 도덕적 규범이나 제도적 규칙에 무감각하고 심미적 혜안이나 역사적 성찰 능력을 결여하기 쉬워, 그야말로 미친 듯한 맹목에 빠져버릴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구호와 복종을 통한 집체적 국가운영은 통할지 모르나 소규모 집단이나 개인의 권리는 무시되기 마련이고, 부정부패는 피할 수 없는 해악으로 인식되기 쉽다. 정권교체기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형 비리사건들은 소득 1만달러 시대를 이룩한 헝그리 정신의 또 다른 선물일 수 있다.
어쩌면 노무현 정부의 등장도 동일한 논리의 정치적 귀결인지 모른다. 헝그리 정신이 퇴조하면서 그것이 초래했던 부정적 효과에 눈뜨게 된 젊은 세대의 정치참여가 시작됐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에 대한 요구가 팽배하게 된 것이 이번 정권 교체의 배경일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노 대통령이 국가운영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에 걸맞은 국정철학을 언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방법에 있다. 공직 사회에 어떤 조직을 만들어서 개혁의 요구에 부응하겠다는 것은 그 요구를 가져온 시대정신과 배치되는 일이다. 그것은 여전히 집체적 국가운영 시대에서나 나올 법한 발상이 아닐까. 소득 2만달러 시대로 가는 길, 그 길은 여전히 관료들의 소명의식 없이는 열리지 않겠지만 여기서는 그 소명의식이 자칫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대립요소 모아서 조직화해야 ▼
노 대통령은 취임 당시 국가운영의 목표로 ‘동아시아의 허브 국가’를 내놓은 바 있다. 원래 ‘허브’는 바퀴살이 모이는 빈 곳, 비어 있으므로 중심이 되는 바퀴통을 의미한다. 우리가 구해야 할 지혜는 이 말의 의미에 숨어 있다. 한국이라는 수레바퀴가 미래로 굴러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행정부부터 그런 바퀴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념이나 내용을 새로 채우기보다는 오히려 비워서 서로 대립하는 모든 것들이 모이고 조직화되는 효과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는 행정부에만 타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가 복잡 다원화되고 갈등요인이 많아질수록 내용적 확장에만 집착하는 ‘헝그리 정신’보다는 형식의 위력을 추구하는 ‘허브 정신’이 곳곳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쯤에서 노 대통령에게 노자의 ‘도덕경’을 감히 권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책이 허브 정신의 최고 경전이기 때문이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