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1일 경기 수원시 한 호텔에서 열린 경기지역 주요 인사 초청 오찬장에서 DJ가 임 지사(가운데), 주혜란과 함께 참석 인사들을 접견하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1999년 7월 7일 오전. 인천지검 특수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사팀은 이날 미국에서 귀국하는 임창열(林昌烈) 경기지사의 부인 주혜란(朱惠蘭)을 체포하는 작전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김진태(金鎭太) 인천지검 특수부장은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에서 출발해 이날 오전 5시반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는 항공기에 주혜란이 탑승했다는 첩보를 입수, 수사관 2명을 공항에 급파했다.
그러나 수사팀은 낮12시까지도 공항 입국장에서 주혜란을 발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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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관들은 공항 출입국관리소에서 이날 미국에서 입국한 탑승객 명단을 확인했다. 주혜란은 없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이름이 발견됐다. ‘헬렌 주.’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한 결과 주혜란이었다. 놓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김진태는 향후 대책을 놓고 고민했다. 검찰 상부에 아직 ‘주혜란 체포작전’에 대해 정식 보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혜란의 처리문제에 대해서는 검찰 상부와 실무팀간에 큰 시각차가 있었다.
이에 앞서 인천지검 특수부는 99년 5월초 ‘서이석(徐利錫) 전 경기은행장이 98년 5∼6월 경기은행 퇴출 직전 이를 막기 위해 임창열 주혜란 등 정관계 인사를 상대로 거액의 금품 로비를 벌였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검찰은 그러나 서이석을 포함해 경기은행 간부 7명을 업체에서 부당 대출 사례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6월 8일 수사 결과를 언론에 공개했다. 첩보내용과 달리 수사 결과는 서이석 등이 오히려 로비를 받았다는 내용뿐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수사검사의 설명.
“수사팀은 임창열 지사에 대한 수사 의지가 있었지만 상부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검찰 수뇌부가 임 지사와 부인 주씨에 대한 수사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죠. 임 지사가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 소속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임 지사에 대한 DJ의 신임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직전 경제부총리에 발탁된 임창열은 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DJ로부터도 큰 신임을 받았고, 98년 6·4지방선거 때 사실상 DJ에 의해 경기지사 여당 후보로 ‘낙점’받아 출마해 당선됐다.
DJ는 임창열과 주혜란이 결혼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대 졸업 후 보건소장으로 활동하던 주혜란은 90년 12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관련 학회 참석차 미국에 갔다가 여동생 소개로 당시 세계은행(IBRD) 이사로 근무하고 있던 임창열을 만났다. 주혜란은 귀국해 DJ를 만난 자리에서 임창열의 얘기를 하던 중 평소 임창열에 대한 좋은 평판을 듣고 있던 DJ로부터 “임창열은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남편감으로 좋다”는 추천의 말을 들었다. 활달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주혜란은 임창열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프로포즈를 했고 두 사람은 91년 2월 결혼했다.
DJ와 주혜란의 인연도 다분히 극적이다. 85년 주한 스페인 대사관에서 열린 스페인 왕 생일 축하 파티에서 처음 만난 DJ(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와 주혜란(당시 용산보건소장)은 파티 다음날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한 식당에서 만나 3시간 가까이 저녁식사를 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DJ였다. 이 뒤 주씨는 DJ의 동교동 집을 방문해 이희호(李姬鎬) 여사와도 친분을 맺었고,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사람들 앞에서 DJ를 ‘오라버니’라고 불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하마터면 묻힐 뻔했던 임창열 주혜란 부부에 대한 수사는 6월 17일 서울고검 검사에서 인천지검 특수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진태가 일선 수사검사들의 불만을 적극 수렴해 은밀히 내사를 진행하면서 다시 물밑에서 본격 진행됐다. ‘주혜란 체포작전’은 그 첫 단추였다.
한 검사의 설명.
“수사팀은 주혜란씨를 전격 체포한 뒤 상부에 보고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천지검 고위간부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검거에 실패하는 바람에 검찰은 법무부에 주씨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주혜란에 대한 수사 사실이 공개되면서 법무부와 대검이 발칵 뒤집혔다.
수사팀은 “임창열 지사 부부 사건을 덮어둘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상부를 설득한 끝에 7월 13일에야 주혜란에게 “내일 검찰에 출두하라”고 통보할 수 있었다.
다음날 검찰에 출두한 주혜란은 경기은행 퇴출이 임박했던 98년 6월 23일 서이석에게서 돈을 받았지만 바로 그날 되돌려줬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주혜란의 운전사를 조사한 끝에 주혜란이 거짓진술을 했음을 확인했다. 운전사는 “주혜란이 검찰 출두 전날 밤 급하게 경기지사 관사로 불러서 갔더니 서이석씨에게 돈을 돌려주는 장면을 봤다는 내용의 경위서를 써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서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를 본 적도 없지만 시키는 대로 경위서를 썼다”고 진술했다.
수사검사의 계속된 추궁에 주혜란은 결국 “잘못했다”며 고개를 떨어뜨렸고 검찰은 7월 15일 주혜란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했다.
임창열은 같은 날 오전 7시50분경 인천지검에 자진 출두한 지 채 4시간도 지나지 않아 서이석에게서 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경기은행 퇴출 저지 대가로 받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돈을 받은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이런 임창열의 태도 뒤에는 사실은 좀 더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
당시 여권 한 핵심 관계자의 설명.
“임창열은 간단한 조사만 받으면 귀가할 수 있다는 정권 핵심부의 언질을 받고 검찰에 출두했던 것입니다.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검찰의 ‘핵심 실세’에게 무마토록 하라는 암시를 준 것도 사실입니다. 마음을 ‘턱’ 풀어놓고 있는 데 강하게 밀어붙이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돈 받은 사실을 시인한 것이죠. ‘설마 나를 어떻게 할까’ 하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사팀은 “임창열씨에게 전달한 돈은 경기은행 퇴출을 막아주는 대가였다”는 서이석의 진술을 근거로 임창열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는 방침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에 대해 검찰 수뇌부는 “같은 사안으로 부부를 동시에 구속할 수 없다”며 수사팀을 압박했고, 수사팀은 “두 사람이 따로 로비를 받은 만큼 같은 사안이라고 볼 수 없다”며 버텼다. 이 때문에 결국 대검 간부 회의에서 장시간 논의한 끝에야 임창열의 구속영창 청구 방침은 가까스로 승인을 받았다. 여권과 검찰 수뇌부의 ‘임창열 구출 작전’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결국 임창열은 서이석에게서 경기은행 퇴출을 막아주는 대가로 1억원을 받은 혐의로 주혜란이 구속된 다음날인 7월 16일 구속됐다. DJ정권이 시작된 뒤 여권 실세로 분류되는 인사가 구속된 첫 사례였다.
여권 핵심 관계자의 설명.
“당시 ‘옷 로비 사건’,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 사건’ 등으로 여권이 수세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임창열씨를 방어하지 못한 측면도 있습니다. 또 여권 일부에서는 임씨 부부를 희생해서라도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죠.”
당시 정치권과 검찰 주변에서는 ‘주혜란씨가 평소 친분관계가 있는 최고위층에 보석을 선물하고 거금을 뇌물로 바쳤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검찰 수사결과 드러난 것은 없었다.
어쨌든 서이석의 임창열 부부에 대한 로비는 ‘실패한 로비’였다. 경기은행은 98년 6월 29일 퇴출됐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인천지검-아태재단 갈등▼
99년 7월 경기은행 퇴출 관련 로비사건을 수사하던 인천지검 특수부는 DJ가 설립한 아태평화재단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검찰은 7월 22일 아태재단 미국 워싱턴 지부 이사로 활동했다고 주장한 이영우(李映雨)가 서이석(徐利錫) 전 경기은행장에게서 경기은행 퇴출 저지 청탁과 함께 1억원을 받은 혐의를 확인, 이영우를 구속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중 이영우가 아태재단과 관련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가자 아태재단측은 “아태재단 워싱턴 지부는 98년 1월 해체됐고 이영우씨도 워싱턴 지부에서 활동한 일이 없다”며 “검찰이 근거도 없이 이영우씨와 재단이 관련 있는 것처럼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고 반발했다.
한 검사의 설명.
“당시 아태재단 관계자들이 인천지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습니다. 서슬이 시퍼랬죠. 수사팀이 부담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당시 수사실무 검사들은 이영우가 아태재단 쪽 인맥을 이용해 로비를 하려 했었다는 ‘심증’을 갖고 있었다.
서이석도 검찰에서 “경기은행 퇴출 5일 전인 98년 6월 24일 친구 소개로 이영우씨를 만나 1억원이 든 가방을 전달했고 며칠 뒤 이영우씨의 소개로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의 조카 이영작(李英作)씨를 만났다”고 진술했다.
이영작은 98년 1월까지 아태재단 워싱턴 지부장을 맡아 DJ의 미국 내 인맥을 관리해온 인물로 97년 대선 때는 여론조사를 맡아 수시로 DJ에게 각종 선거전략과 정책 조언을 했던 ‘핵심 실세’.
그러나 검찰은 이영우가 이영작을 통해 경기은행 퇴출 저지를 시도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벌였으나 이를 입증할 단서는 결국 확보하지 못했다.
서이석은 “이영작씨를 만난 자리에서 ‘경기은행이 어렵다’는 얘기는 했지만 이영작씨가 원론적인 대답만 해 부탁을 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영우도 이영작에게 경기은행 퇴출 관련 청탁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영작은 이영우가 구속된 다음날 미국으로 출국해 도피 의혹을 사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