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환갑을 맞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사진제공 김혜경
아버지가 묻힌 산을 내려오면서 아이들에게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 나왔다. “엄마는 이제 백이 없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내 아이 둘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을 겁내지 않고 살아온 힘이 아버지가 주신 힘이었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너를 존중한다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마음이 언제나 공기처럼 나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지켜보아주던 그 눈빛을 보며 안심하고, 네 판단이 언제나 옳다는 절대적인 신뢰에 용기를 얻었다는 것을.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살았다는 것을.
두 차례나 사업에 실패하시고 10여년 동안 경제적으로 무력한 가장이었지만 나는 한순간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버린 적이 없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그 분이 한순간도 아버지로서의 자세를 흩뜨린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이가 좀 들고 나니 한 사람이 품격을 잃지 않고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 같다. 더욱이 착하게,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나의 든든한 배경이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감각으로 일을 하고, 그 분이 몸소 보여주신 존중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높은 이상과 한결 같은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산다. 그러나 내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부모인가. 참을성 없는 엄마인가. 더 많은 시간을 그들을 위해 투자해야 하며 지켜봐주고 그들의 처지에 서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평생을 아버지가 주신 자신감을 밑천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부모 노릇을 아버지만큼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오후 9시만 넘으면 큰길까지 나와 기다리시던 모습을 떠올리니 정말 아버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