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아빠 닮았답니다.“ 최근 은퇴한 ‘왕눈이 센터’ 정은순(왼쪽)이 6개월 된 딸 나연양과 머리를 맞대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수원=강병기기자
“이거 좀 드세요.”
아시아 최고의 센터로 코트를 호령하던 그가 과일을 내왔다. 구기 종목 가운데 가장 큰 공을 갖고 하는 농구선수 출신. 손에 쥐어진 과도가 유난히 작게 보였지만 능숙하게 참외와 토마토를 깎고 잘라 맵시 있게 접시에 담는 모습이 영락없는 가정 주부다. 그새 살림꾼이 다 된 것일까.
10년 넘게 한국 여자농구 대들보로 활약해 온 정은순(32). 최근 은퇴를 선언한 정은순을 수원 영통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집에 들어서자 현관의 유모차가 눈에 들어온다. 보통 유모차보다 훨씬 크다. “미국에서 구해왔어요. 애기가 좀 큰 편이라….” 그러면서 아기를 데려오는 데 ‘좀 큰 편…’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듯 싶다.
6개월 된 첫 딸(장나연)은 벌써 돌 지난 듯한 ‘슈퍼 베이비’. 태어날 때 4.1kg이었고 현재 몸무게 12.5kg에, 키는 75cm. 또래 여자 아기가 보통 65cm, 7∼8kg 정도니까 우량아다. 하긴 엄마는 1m85, 아빠(장재호)는 1m89에 0.1톤이 넘으니까 우량아가 아니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아이가 크면 농구 시키겠느냐”고 묻자 대뜸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애가 원해야 하겠지만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이에요. 엄마보다 훌륭한 선수로 키워야죠.”
98년 3월 결혼한 정은순은 지난해 초 애를 가지면서 겨울리그를 마지막으로 운동을 중단했다. 당초 다음달 개막되는 여름리그에 코트에 복귀하려 했으나 체력 저하와 육아 문제, 소속팀 삼성생명과의 재계약이 난항을 빚으면서 코트를 떠나기로 했다. “살림과 운동을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네요. 나이가 들어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 줄 때도 됐고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80년 처음 농구를 시작한 정은순.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여자농구와 영욕을 같이 해왔다. 인성여고 1학년 때 박찬숙 이후 최연소 기록으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90년 베이징과 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을 따냈다.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ABC)대회에서 2차례 정상을 밟았으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4강 신화의 주역. 그 영광의 순간을 보여주듯 집안 장식장에는 메달, 트로피, 훈장이 가득하다.
잊을 수 없는 순간도 많았다. 남북한이 공동 입장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남측 기수를 맡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처음엔 안하려고 했어요. 다음날 경기가 있어서 훈련 스케줄에 방해를 받게 됐거든요. 동료들에게 미안했죠.” 승부욕이 강한 정은순에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보다 당장 내일 게임에 이기는 게 중요했던 것.
아픈 기억도 있었다. “고 2때 갑상선 질환에 걸려 운동을 그만둘 뻔 했을 때 정말 힘들었어요. 자고 일어나면 체중이 줄고 체육관 한바퀴 돌기도 힘들었으니까요.” 1년 동안 쉬면서 약물 치료와 체질 개선에 공을 들인 덕분에 다행히 공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갑상선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15년째 호르몬제를 먹고 있다고.
또 94∼95농구대잔치 결승에서 SKC에게 2연승 한 뒤 최우수선수상 수상자로 미리 결정됐다가 팀이 내리 3연패, 우승컵을 내준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정은순은 요즘 뒤늦게 배운 집안일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남편 내조는 물론 아기 젖 주고 목욕시키다 보면 하루가 정신없이 후딱 지나간다고. “처음에는 집에 손님만 온다고 해도 겁이 덜컥 났어요. 할 줄 아는 게 없었거든요.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요.” 오징어볶음과 김치찌개는 그의 18번. 찬거리를 살 때 대형마트 보다는 아파트에 서는 장을 이용하는 게 값도 싸고 신선하다고 할 만큼 알뜰 주부가 됐다.
그래도 강산이 두 번 변할 긴 세월 동안 함께 한 농구를 그만 두는 게 쉬울 리 없다. “기회가 닿으면 또 코트에 나설 겁니다. 이대로 선수 생활 마감하고 싶지 않아요. 20분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자신이 있거든요. 실제로 몇 팀에서 제의가 왔고 접촉도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잘 안됐습니다.”
지난해 만삭의 몸으로 학업을 병행한 덕분에 정은순은 올 2월 용인대 사회체육과에서 고교 졸업 후 13년 만에 학사모를 썼다. 장차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 체육 또는 체육 심리학을 전공해 학위를 따고 싶은 게 정은순의 포부.
“현역 복귀든, 지도자든 농구와 관련된 일을 할 겁니다. 체육 교사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물론 집안 살림도 똑 소리 나게 해야죠.”
신세대 주부의 야무진 꿈은 큰 눈망울만큼이나 컸다.
수원=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정은순은 누구
△생년월일=1971년 7월18일
△출생지=인천 △혈액형=O형
△가족관계=남편 장재호씨(35)와 6개월 된 딸 나연 △체격=1m85, 75kg
△학력=인천 인성여고(90년 졸업)-용인대(2003년 졸업)
△경력=삼성생명(90∼2003년)
△종교=기독교 △특기=수영△주량=소주 1병 △취미=영화 감상
△주요 포상=90년 농구대잔치 신인상, 94∼95, 96∼97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상, 농구대잔치 8회 연속 ‘베스트5’. 98,99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최우수선수상, 2000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 최우수선수상
△주요 국제경기실적=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 금메달, 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 금메달, 97년 방콕ABC, 99년 시즈오카ABC 금메달, 97년 부산 동아시아경기 금메달,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