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중국 시안(西安)을 방문한 적이 있다. 수천년 전 이미 도시계획 하에 사통팔달 도시를 구축한 중국인들의 선견지명이 놀랍기도 했고, 아직도 쓸 만한 도시라는 점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때쯤 우리 선조들은 지게에 한껏 짐을 싣고 고불고불한 언덕배기를 숨 가쁘게 올랐을 터이다. 1970, 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미국인들은 200년 동안 전국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망을 구축하고 세계적인 도시를 수십개 세웠는데, 우리는 그 자랑하는 반만년 역사 동안 뭘 하고 있었나 하고 조상들을 은근히 원망한 적도 있었다.
▼‘지속적 혁신’ 선조들의 생존전략 ▼
그런데 다음날 시안의 곳곳을 걸어 다니면서 그들의 열악한 삶을 보는 순간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미국 유학시절 원망했던 조상들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순간 중국이 왜 우리를 흡수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왜 못한 것일까 하는 오랜 궁금증이 재발했다. 흡수 못한 다른 국가인 베트남, 몽골과는 달리 매력적인 산천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의문은 시안에 신라방이 있었음을 알고 나서 점차 씻기기 시작했다. 신라방은 신라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일컫는데, 그곳 신라인들은 단순한 장사치들이 아닌 기술전도사였다. 서역에서 진기한 물건이 도착하면 이를 습득하자마자 본국에 들여와 중국인들과 비슷한 시점에 제품생산을 도모한 기술공신이었던 것이다. 요새 말로 ‘기술 스파이’인 셈이다. 지적재산권이 없던 시대이니 불법도 물론 아니었겠지만 국익이 달린 일이니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이런 전통은 고려 말기 문익점으로 이어지고 명·청시대 베이징의 고서점가인 유리창으로부터 기술 도입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 조선인들에게로 이어졌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칭송받는 12세기 고려청자도 알고 보면 중국인들이 4세기에 개발한 중국청자 기술을 9세기에 답습한 후 300년 동안 연마하면서 우리의 창의와 멋을 가미한 결과물인 것이다.
최근 반도체가 우리 경제를 지탱하듯이 당시 청자는 큰 버팀목이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지속적인 혁신(innovation)이 독립국을 지키며 살아온 한국인들의 생존전략이었던 것이다. 치욕적인 35년간의 일제강점도 조선조 말 교조적인 유학에 빠져 실학에 의거한 혁신을 하지 못한 결과라 볼 때, 우리 민족의 살길은 역시 끊임없는 혁신인 것이다.
끊임없는 혁신이 우리에게 보다 절실한 것은 부존자원이 인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유럽 국가들처럼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다면 그들처럼 느긋하게 복지국가 건설을 내세워도 좋을 것이다. 국내총생산(GDP)의 40∼50%가 삼림이나 수산물 등 국내자원으로 충당되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산천과 갯벌은 있되 돈 벌어 주는 자원이 없으니 자나 깨나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우리는 따뜻한 동남아 국가와는 달리 일단 경제가 망하면 추위를 피할 길 없고 굶을 수밖에 없다는 악몽을 꾸지 않았던가.
▼‘무원칙-근시안 국가경영’버려야 ▼
우리는 조상들의 혁신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과거의 혁신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현대의 혁신은 세계 일류국가클럽에 들어가기 위한 혁신이 돼야 한다. 세계 경제가 1등만 환호받는 구조로 변모해가고 있음에도 우리의 국가시스템은 2류, 3류다.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은 정치 부패로 국가이미지는 실추되고, 썩은 회사를 퇴출시키지 못하는 금융시스템으로 또 다른 위기의 싹은 자라나고 있다. 낡은 설비에 그나마도 대학원생이 없어 운영이 어려운 실험실로 대학은 공멸하고, 노동 원칙이 무시되어 투자를 두려워하는 기업들은 늘어나고 있다. 그 옛날에도 저 멀리 중국 서편에 사람을 상주시켜 서역의 기술을 학수고대하던 신라인의 미래투자가 있었는데 오늘날엔 이런 것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 해야 할까. 경쟁이 그때에 비해 수백배나 치열해졌는데도 말이다.
미래에 빚을 넘기는 각종 무원칙과 단명(短命)정책들을 과감히 버리고 미래를 키우는 시스템 개발에 힘 쏟을 때다.
선우석호 홍익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