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거기 너 있었는가.” 현 여권의 개혁주체로 꼽히는 사람들이 개혁멤버십을 가리는 기준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가까이는 작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의 곁을 지켰느냐는 물음이고, 조금 멀리는 노 대통령이 자신의 법통(法統)이라고 밝힌 87년 6월 항쟁 때 ‘거리’로 뛰쳐나왔느냐는 물음이다. ‘DJ 만세’를 집권 직전까지만 불렀으면 멤버십을 부여했던 5년 전보다도 야박한 편이다. 그만큼 그들의 개혁독점욕이 유난스럽다는 얘기가 된다.
‘개혁동아리’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학창시절 또래서클을 연상케 하는 그들만의 감성적인 연대의식과 배타성 때문이다. 잡초제거론이니 인적청산론이니 범민주연합론이니 하는 발상의 뿌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선혈이 낭자한 권력투쟁을 할 것이다”는 한 핵심인사의 선언은 개혁동아리가 ‘권력동아리’임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신당논의를 둘러싼 여권의 내분은 이미 치열한 권력투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동안 끊임없이 되풀이돼 온 개혁의 유전(流轉)이 또 한차례 시작된 셈이다.
개혁은 이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광복 이후 최대의 개혁은 건국이었고 4·19와 5·16엔 아예 혁명이란 호칭이 붙었다. 전두환 정권조차 개혁을 내세워 집권 정지작업을 했으니 민주화 이후의 정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개혁이 권력기반의 확대 및 유지수단으로 변질되는 순간 어김없이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걸었다. 일찍이 김지하 시인이 ‘오적(五賊)’이라는 시에서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라고 읊은 게 이젠 상례가 돼버렸다.
지난 정권 개혁의 실패가 다시 새 정권 개혁의 수요를 창출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으레 개혁몸살을 앓는 이유다. 그런데도 악순환이 멈추지 않는 것은 언제나 집권세력의 아집과 건망증 탓이다. 승자인 자신들은 정의롭고 그런 자신들이 추진하는 개혁은 절대선이라는 착각 속에서 지난 정권의 오류를 자기도 모르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거에서의 승자가 곧 정의는 아니다. 또한 국민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개혁의 선악은 결과를 놓고 판단해야 옳다. 개혁은 수단일 뿐이다.
실질 집권 기간은 6개월을 넘긴 현 정권 개혁의 표류도 비슷한 오류에서 기인한다. 대선 이후 줄곧 불화와 반목으로 지새우며 사실상 여당이기를 포기한 민주당의 현주소가 상징적이다. 신당논의와 관련해 어느 편을 들 생각은 없지만 당내 개혁주도세력의 독선이 너무 두드러진다. 오죽했으면 개혁의 표적이 된 사람들이 “그러면 더 엄혹한 시절에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되묻겠는가. 이렇게 되묻고 싶은 게 그들만은 아닐 것이다.
16년 전 이맘때 ‘거리’엔 지금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도 ‘그때 거기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고, 오히려 반대쪽에 있다가 세월의 변화에 편승해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목소리는 크지만 신의는 부족하다. 어쩌면 개혁 저항세력보다 이처럼 시세에 밝은 ‘개혁장사꾼’들이 개혁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더욱 부추기는지도 모른다.
임채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