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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홈]'부자의 이동' 한국富村의 역사

입력 | 2003-06-25 16:15:00



어느 나라에나 부자들이 모여 사는 부촌(富村)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소득수준이 비슷한 집단끼리 군집을 이뤄 살면서 배타적 거주공동체를 자연스럽게 형성한다. 끼리끼리 모여사는 일종의 유유상종(類類相從)인 셈이다. 한국 역시 19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기업 오너를 비롯한 부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한국 부촌의 무게중심은 시대에 따라 잦은 이동을 해왔다.

정치권력이 우세했던 개발독재시절에는 ‘돈’이 ‘권력’ 주변에 몰려들었다. 청와대에서 가까운 서울 성북구 성북동과 용산구 한남동이 전통 부촌으로 자리 잡은 이유다. 하지만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촌은 한강 이남의 여러 곳으로 퍼져갔다.

주거유형도 시대에 따라 단독주택에서 대형 아파트, 빌라를 거쳐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라는 새로운 주택상품에 이르렀다.

▽전통 부촌 성북동과 한남동=성북동이 한국의 부촌으로 자리잡은 것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성북동은 60년대까지만 해도 부자 동네라기보다 권력 실세들의 아지트였다. 청와대에서 가까워 차지철 전 대통령경호실장, 양택식 전 서울시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권력 주변에는 자연스레 ‘돈’도 몰려들었다. 구자경 LG 명예회장,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신용호 교보생명 명예회장 등 대기업 창업주들이 터를 잡았다.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영빈관은 정재계 고위 인사들의 ‘사교장’이기도 했다. 성북동에 정몽근 현대백화점 사장,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등 ‘현대 일가’가 몰려 있다면 용산구 한남동 일대는 ‘삼성 타운’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남동과 마주한 이태원동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해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 삼성가(家) 오너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한남동에는 LG그룹 구본무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신격호 롯데 회장, 박삼구 금호 회장과 외국계 회사 임원들이 군집해 있다.

대주주 지분 정보제공업체인 미디어에퀴터블에 따르면 이곳에 살고 있는 대기업 총수들의 보유주식 시가총액이 2001년 8월 말 현재 2조4000억원을 넘어 한남동 일대는 한국 최고의 부자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70년대까지 성북동과 한남동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부촌이었다면 80년대 강남권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방배동 서초동 압구정동 논현동 청담동 도곡동 등이 신흥 부촌으로 떠올랐다.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김창석 교수의 연구논문 ‘서울시 파워엘리트의 거주분포 특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79년부터 파워엘리트의 강남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해 89년부터는 국내 저명인사의 절반 이상이 강남에 정착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2002년 말 현재 △법조인 61.3% △의료인 56.4% △기업인 54.0% △금융인 52.8% △공무원 50.2% 등 각 전문직 종사자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다.

강남이 부촌으로 빠르게 정착하는 데는 70년대 대규모 토지구획사업, 택지개발사업과 함께 정부의 도심규제정책의 영향이 컸다.

정부는 72년 도심 인구분산 정책을 목표로 △강북지역의 학교신설 및 확장 불허(74년) △입시학원 강남 이전(76년) △도심 중고교 강남 이전 및 강북지역 아파트 신축금지(77년) 등 도심인구 분산 정책을 쏟아냈다.

70년대 초 영동, 잠실과 80년대 초 개포 가락 문정 수서 등 대규모 택지 공급도 강남 활성화에 기여했다.

▽주거유형의 변화=부촌이 한강을 넘어오면서 주거유형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대기업 창업주를 비롯한 부자 1세대는 여전히 한남동이나 성북동 등의 단독저택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지만 강남에 둥지를 튼 부자 2세대들은 대형 아파트와 빌라를 선호한다. 특히 70년대 중반 여의도에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아파트의 편리함은 널리 인정받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업무용 빌딩에나 있던 엘리베이터가 아파트에 설치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촌 아파트는 73년 반포 한신공영아파트 77년 압구정동 한양, 현대아파트, 80년대 아시아선수촌, 올림픽기자촌 아파트 등으로 서서히 ‘동진(東進)’하다가 작년 입주한 주상복합아파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서 정점을 이뤘다.

주거주택연구원 김승배 원장은 “편리함과 프라이버시를 추구하는 쪽으로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면서 아파트의 편리함과 빌라의 고급성을 융합해 대규모 단지로 묶은 주상복합아파트가 ‘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앞으로 부촌은 어디=부동산 전문가와 강남권 중개업자들은 21세기의 새로운 부촌으로 판교를 ‘0순위’로 꼽는다.

유니에셋 오석건 전무는 “강남권의 핵심은 호화저택이 밀집해 있는 방배동, 부와 출세의 상징인 압구정동, 학군이 좋은 대치동을 찍고 타워팰리스가 있는 도곡동까지 우하향(右下向) 추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강남축의 연장선에 있고 쾌적한 환경과 발전 가능성이 풍부한 판교가 유력한 부촌 후보지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송파 잠실권과 수서지역 역시 강남의 중심권으로 손색이 없다”면서 “특히 잠실 송파권의 대단지 소형저층 아파트가 재건축되면 고급 주거지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