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거리' 로 불리는 미국 휴스턴 중심지에 자리잡은 엔론의 본사 건물 '데스스타'. 동아일보 자료사진
탐욕의 실체
브라이언 크루버 지음 정병헌 옮김
421쪽 1만4000원 영진닷컴
2001년 9·11테러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사라진 한 달 뒤 미국인들은 또다시 휴스턴에서 신용과 정직이라는 ‘가치의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에너지복합기업인 엔론의 파산.
사건이 나기 몇 달 전만 해도 엔론은 포천이 선정하는 500대 기업에서 7위를 차지했으며 혁신(Inno-vation)과 경영진 자질 분야에서 4년 연속 1위에 오른 그룹이었다. 이 책은 엔론이 파산하기 직전 입사해 엔론이 몰락하기까지의 과정을 1년 동안 지켜본 한 신입사원의 파산 경험기다.
엔론 본사 건물인 데스스타에 ‘세계일류회사(World leading company)’라고 적힌 현수막을 바라보며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던 그는 1년도 못돼 회사에 배신당한 낙오자가 되고 말았다.
엔론의 거품과 파산은 부도덕한 경영진, 비리를 눈감아준 회계법인, 기업감독을 게을리했던 정부당국, 무책임한 언론의 합작품이었다.
엔론의 2001년 1·4분기 실적은 전년 대비 주당 순이익 18% 증가, 분기별 총수익 281% 증가(500억달러), 순수익 20% 증가(4억달러) 등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서 2001년 회계연도의 수익목표를 주당 1.70달러에서 1.80달러로 올려 잡았다. 엔론의 미래는 온통 장밋빛이었고 직원과 언론들은 엔론의 경영진이 내놓는 달콤한 말에, 각종 특혜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엔론의 수익은 정상적 거래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었다. 엔론의 경영진은 법망을 피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부정을 저질렀다.
엔론은 우선 특수관계를 가진 합자회사를 하나 만들었다. 이 회사는 외부투자자가 3% 이상의 지분을 갖는 회사, 즉 엔론과 연결재무제표를 만들 필요가 없는 회사여야 한다. 그리고 합자회사 명의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뒤 엔론의 자산을 합자회사에 파는 척하면서 대출금을 엔론으로 끌어들였다. 엔론이 받은 돈은 수익으로 기록되고 부채는 합자회사의 몫으로 남게 된다. 엔론은 이런 회사를 무수히 만들어 막대한 돈을 끌어들였고 금세 재무상태가 양호하고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 회사로 탈바꿈했다.
이 같은 거래 과정에서 엔론의 최고재무책임자 엔디 패스토는 3000만달러의 커미션을 합법적으로 챙겼고 그 외의 경영진 역시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을 팔아 수백만달러씩 이득을 봤다. 엔론의 회계를 감시한 아서앤더슨은 정상가격보다 몇 배 높은 서비스료를 챙겼다.
하지만 엔론의 외줄타기 놀음은 9·11테러 이후 주가가 폭락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됐다. 엔론은 결국 2001년 10월 16일 3·4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비반복적 손실’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10억1000만달러의 부채를 밝힐 수밖에 없었고 두 달 뒤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저자는 최고경영진이 직원에게 보낸 메일, 각종 자료, 직원 100여명과의 만남을 소개하면서 파산 전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파산하는 배 위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코미디와 같은 에피소드들은 ‘존경, 정직, 대화, 탁월함’이라는 엔론의 핵심가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엔론의 파산 이후 엔로니티스(Enronitis)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것은 ‘엔론과 같은(Enron as it is)’을 축약한 말로 엔론처럼 재무구조가 부실하거나 변칙회계 의혹에 휩싸인 기업을 지칭하는 말이다. 엔론은 ‘세계 일류 사기단(World leading con)’이었을 뿐이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