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의 역사 문제가 쟁점화될 때마다 떠올리는 일이 있다. 552년 백제 성왕이 일본 천황에게 금동불과 불경 여러 권을 선물로 보내 불교 전래의 계기를 만든 것과 백제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문자문화가 시작된 일이 그것이다.
불교와 유교로 상징되는 대륙문화는 백제를 통해 처음 일본에 수입됐다. 일본 최초의 대사찰인 법흥사는 백제의 스님 혜총이 초빙돼 낙성식을 가졌다. 사원과 궁정들의 건축과정에는 백제의 기술자와 스님, 화가들이 활약했다. 일본 최초의 수도인 아스카(飛鳥)와 나라(奈良)의 문화는 백제인의 선도(先導)로 꽃피우게 된다. 호류지(法隆寺)의 국보인 백제관음이 상징하듯 일본의 새벽은 백제문화와 함께 시작된다.
663년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때, 일본은 백제 왕족의 원군 요청을 받고 대거 군선(軍船)을 보냈지만 금강 하구 전투에서 대패하고 많은 백제의 신하들과 함께 철수한 역사가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한반도에서 도래인(渡來人)이 대거 일본에 건너왔다.
내 고향인 규슈(九州) 미야자키(宮崎)현 난고무라(南鄕村)에는 백제 왕족 정가왕(楨嘉王)과 그의 차남인 화지왕(華智王)을 모시는 신사(神社)가 있다. 옆 마을에는 장남 복지왕(福智王)을 모시는 신사가 따로 있다. 세 사람은 672년 일본 조정의 권력투쟁 때 수도를 떠나 규슈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때 ‘1300년 만의 귀향’이란 이름 아래 이들 3명의 신주(神主)가 부여에서 1박한 뒤 사물놀이패의 인도 아래 박람회장에 입장했다. 이 행사는 당시 한국 언론매체에 크게 보도됐다. 필자는 이 일을 계기로 한일 백제 연구자 40∼50명을 모아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만드는 등 한일친선에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내 고향 난고무라의 별명은 ‘백제 마을’이다. 부여에 현존하는 고찰의 일부를 복원해놓았고 당시 낙성식에는 한국의 국회의원과 문화인, 부여의 명사 등 40여명이 참석했다. 마을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이들을 맞아주었다. 이후 내 고향에는 한글 교실, 사물놀이 연수반, 김치 만드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한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끊이지 않는다. 나는 부여를 세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의원이 총리에 오르기 전 함께 부여와 공주의 유적지를 찾은 적도 있다.
일본의 고도 나라는 보통의 ‘나라’를 뜻한다. 일본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발음하는데 이는 ‘큰나라(巨國)’라는 한국 발음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 최초의 수도 ‘아스카’는 ‘안숙(安宿)’이라는 한국 음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백제에서 건너온 문화인이 당시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일제 강점부터 한일 국교정상화까지 60년의 어두운 역사가 1300년의 오랜 양국 교류사를 지워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아직 많은 일본인은 이토록 깊은 한국과의 역사적 인연을 알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이처럼 깊은 양국의 인연을 최근 역사 때문에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과 일본이 이처럼 깊이 교류해온 역사를 가진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오하라 이치조 일본 중의원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