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서울 강남구 산학협동재단빌딩 이사장실에서 최근 경제난국을 풀어갈 해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박영대기자
《경기 침체와 노동계의 잇따른 파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기 위해 본보는 남덕우(南悳祐) 전 국무총리와 대담을 가졌다. 남 전 총리는 현재 상황을 비(非)경제적 요인이 부른 경제위기라고 진단했다. 가치판단이 마비되고 실력행사가 판치는데도 정치지도자들은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나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념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청와대 조직을 줄이는 대신 국가경제 전반의 기획조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현 경제상황에 대해 경제위기라는 시각과 일시적인 불경기라는 시각이 맞서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일시적 불경기는 경제의 자연 치유력과 정책적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지만 오늘의 경제 난국은 비경제적 요인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경제적 요인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할 가치판단이 마비됐고 실력행사와 아귀다툼이 판치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마치 탈(脫)권위주의 과정처럼 안이하게 보는 정치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아집과 궤변(詭辯)을 일삼고 있습니다. 대북관계, 노사관계, 한총련 합법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논란 등 저변에 이념적 시각을 깔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정치권과 행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계 장관들마저 말과 태도에 분열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익단체들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문제가 새만금 간척사업을 포함해 적어도 24건이나 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에게 확실한 국가관과 신념체계가 없으면 그 시비를 가려 정책적 결단을 내릴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도자가 어려운 결정을 회피하고 경우에 따라 말과 태도를 바꾸면 혼란이 가중될 뿐입니다.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지만 원칙 없는 타협은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거나 혼란을 부추길 뿐입니다.
정치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념을 재천명해 국민의 정신적 구심점이 돼야 합니다. 정신적 구심점이 없으면 국민 통합이 불가능하고 애국심이 없으면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내외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경제적 요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경제 환경을 개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정부가 주창하는 동북아 경제 중심지 개발도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에게 소득 2만달러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리더십이 아쉬운 때입니다.”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할 때 한국 경제의 비전은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요.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라는 포괄적인 용어는 경계해야 합니다. 우선순위와 출발점이 있어야 합니다. 물류중심지로 개발하면 외국기업이 몰려와 분배센터를 세울 것입니다. 또 주변에 생산기지도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정보기술(IT) 서비스 기술개발 관련 산업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강력한 자력(磁力)이 필요합니다. 물류 중심지가 그 자력입니다.”
―최근 경제5단체가 “파업이 계속되면 투자를 줄이고 공장을 해외로 옮길 수밖에 없다”면서 파업 자제를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노동계는 강경투쟁노선을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노사문제의 해결책은 없겠습니까.
“글로벌 스탠더드, 특히 국제노동기구(ILO)의 기준을 따르도록 노사 양방이 노력해야 합니다. ‘정부가 법대로 하라’는 것이 국내외 기업인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정부가 노사정위원회를 법제화한 것은 잘못입니다. 노사정위원회를 법제화한 결과 정부는 노조의 협상 당사자로 전락해 분쟁의 합리적 조정이 어렵게 됐습니다. 노사문제는 노사간의 협상에 맡겨두고 정부는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을 배경으로 조정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기업들도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여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근로자들이 자기회사를 사랑하고 보람 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노조는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노조 밖 실업자의 처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외국투자가 들어와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고 임금이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자연 자원이 없는 나라가 외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임금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길은 오로지 근면과 머리밖에 없습니다. 기업과 노조가 흉금을 털어놓고 진심으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면 노사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개혁에 대해 일각에서는 ‘포퓰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그런 요소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정책의 현실성과 논리적 타당성을 무시하고 대중적 정서에 영합하는 정치 성향을 ‘포퓰리즘’이라고 하는데 대통령 주변사람들이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행정경험이 없기 때문에 허점을 드러내는 사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경험 있는 사람만 행정을 맡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3학년 때의 열정과 사회관을 가지고 국사를 다루면 위험합니다. 따뜻한 가슴뿐만 아니라 냉철한 머리를 가져야 나랏일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지금의 청와대 행정 시스템을 어떻게 보십니까.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청와대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15개 위원회가 있고 비서실장 산하에는 5개 보좌관실, 5개 수석비서관실, 3개 기획단, 3개 위원회가 있습니다. 비서실의 총인원은 498명으로 김대중(金大中) 정부 말기보다 60명이 더 많습니다. 정무 분야에 인력이 집중돼 있고 정책 업무에는 전체의 약 10%가 배치돼 있습니다.
편제는 방대하고 복잡한데 내각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속히 정부의 통일적 의사결정을 이끌어내는 조정기능이 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예컨대 각종 위원회가 양산되었는데 각 부처 장관, 실장, 국장들은 수많은 회의에 참석하느라고 자기 일을 돌볼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화물연대 파업 때 건설교통부는 16개 기관에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또 각 부처간의 업무분담과 조정기능이 명확치 않아 갈팡질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기구를 간소화하고 대신 국가경제 전반의 기획기능과 조정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10대들은 입시에 매달려 있고 20대 엘리트들은 고시와 의과대학에 주로 몰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장기적인 인재 운용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데 충고를 부탁드립니다.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확실한 국가이념을 심어줘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전 교육과정을 통해 애국심을 가르칩니다. 여중생 사망사건이 대대적인 촛불시위와 반미감정을 부른 데 비해 서해교전에서 사망한 국군장병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명백한 가치 전도입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사람은 대통령입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국민통합을 강조했는데 뭘 향한 통합인지는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노 대통령은 통합의 구심점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해야 합니다. 일각에서는 북한을 자극한다고 주장하는데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해서 통일을 추구한다는 점은 우리 헌법에 명백히 나와 있고 북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창의력 중심의 교육이 이뤄져야 합니다. 뜻과 능력은 있지만 규제 때문에 창의력 중심의 교육을 하지 못하는 교육자가 많습니다. 규제를 풀어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창의력 교육이 이뤄지도록 하고 외국학교도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대담=고승철 경제부장
정리=천광암기자 iam@donga.com
▼南 前총리의 경제 활성화 대책▼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수도권 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증설을 조속하게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지방 분권화를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경기부양을 위한 적자 국채의 발행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남 전 총리가 말하는 경기 활성화 해법.
▽수도권 집중과 지방분권화=전략산업의 확장과 비용 절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지금 시간이 없다. 늦기 전에 수도권 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증설을 허가해야 한다.
기존 공장의 확장을 저지해 인위적으로 지역간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이다. 적극적인 방법은 지방경제를 개발하는 것이다. 지방산업을 개발하면 지역간 격차가 줄어들고 수도권 집중을 완화할 수 있다.
현재 행정 교육 노조 등 모든 것이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데다 돈마저 없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재정을 포함한 지방분권화는 새로운 성장기폭제가 될 수 있다. 지자체가 노사관계 안정을 포함, 유리한 기업 환경을 조성해 경쟁적으로 외국 투자 유치에 나선다면 동북아 경제중심지 건설이 촉진될 수 있다.
▽적자 재정 및 부동산 대책=추가경정예산의 경기부양 효과가 불충분하면 국채를 발행해 동북아 물류 중심지 개발과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재정은 불황 때 적자를 내고 호황 때 흑자를 내도록 법적 장치를 만들어 두면 장기적으로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국채 금리를 약간 높게 정하면 부동산에 몰렸던 부동자금의 탈출구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정부가 전매(轉賣) 규제와 세무사찰 등으로 부동산 투기를 일시적으로 진압했지만 머지않아 그 반작용으로 부동산 경기 냉각이 정부를 괴롭힐 것이다. 장기적 대책으로 부동산거래소 설치를 검토해야 한다.
▽중소기업 육성=지금보다 중소기업의 역할이 중요한 때는 없다. 그들의 경영능력 제고, 기술 개발, 서비스 개선에 한국 경제의 장래가 달려 있다.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과감한 투자계획을 세워야 한다. 중소기업에 청년 실업자를 흡수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면 실업문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1969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재무부 장관과 경제부총리를 연이어 지내면서 70년대 고도성장 경제정책을 주도했다. 80년대 초반에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공직을 떠난 이후에도 한국 경제가 중대한 갈림길에 설 때마다 경륜과 비전이 돋보이는 조언을 해 주목을 받았다. 그가 65년에 쓴 ‘가격론’은 체계적인 미시경제학 이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교과서.
△1924년 경기 광주(廣州) 출생 △국민대, 서강대 교수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국무총리 △한국무역협회 회장 △산학협동재단 이사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