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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달러서 주저 앉나]'내몫 챙기기' 집단신드롬

입력 | 2003-06-30 18:34:00


《“요즘 한국사회는 이른바 ‘떼법’과 ‘빽법’ 두 가지 법이 지배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조직은 너도 나도 집단행동에 나서고 힘이 있는 집단은 공정하고 투명한 방법이 아니라 편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김태기·金兌基 단국대 교수·분쟁해결연구센터 소장)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지나친 ‘내 몫 챙기기’는 직종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있다. 노조는 물론 공무원 영화배우 이장·통장까지 각자 처우개선과 권리주장에 앞 다퉈 나서고 있다.》

▽만연하는 ‘한국병(病)’=요즘 경제부처가 몰려있는 정부과천청사 앞 운동장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확성기 소리와 구호로 시끄럽다. 과천경찰서에 따르면 올 들어 6월 말까지 54건의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참다 못한 인근 학교와 주민들은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의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시위를 자제해달라는 팻말을 운동장 주변 곳곳에 설치했다.

집회내용도 주로 ‘생계형’이라기보다는 자기 몫을 조금이라도 더 찾겠다는 ‘집단이기주의형’이다. 5월에는 아산지역 주민 5000여명이 100여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과천청사에 몰려와 경부고속철도 ‘천안아산역의 이름을 ‘아산역’으로 바꿔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장송곡을 틀었다.

국회가 있는 서울 여의도나 정부중앙청사가 있는 도심 광화문 인근도 하루가 멀다 하고 옥외 집회가 열린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참석자가 몇 명이든 어김없이 확성기가 울린다.

서울뿐만 아니다. 지난달 울산문화예술회관 노조는 부당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울산시청 옆 인도 위에 천막을 치고 고성능 확성기를 동원한 집회를 계속했다. 참다 못한 주민들은 집안에서 전화도 못 하겠다며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최근 발생한 각종 대형 파업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임금인상이나 근로기준 향상 등 본래 의미의 노조활동이라기보다는 과도한 ‘내 몫 챙기기’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지낸 이진순(李鎭淳) 숭실대 교수는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현 상황에서 보면 자본가의 몫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열악한 비(非)조직 노동자, 실업자의 몫과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장 통장까지 내 몫 챙기기에 가세=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15개 시도, 82개 시군의 이·통장 3000여명은 올 6월 ‘전국 이·통장 연합회창립총회’를 가졌다. 이들은 △대학생 자녀 학자금 지원 △공무 중 사고의 산재(産災) 적용 △마을공사 명예감독관 법적 인정 등을 요구했다. 이·통장들이 전국적인 모임을 갖고 정부에 처우개선을 요구하기는 처음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론도 나름대로 명분은 있지만 영화배우 감독 제작자 등의 ‘밥그릇 위기의식’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때문에 한미투자협정 체결문제는 98년 이후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

한국과 칠레 정부 사이에 체결된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이 우리 국회에서 늦어지는 것도 여야 정치권이 농민들의 ‘표’를 의식해서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 때문에 칠레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확산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소수의 이익, 전체의 해악’=전문가들은 지금 우리 사회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을 하지만 이것이 사회전체 발전에는 악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김태기 교수는 “특정 집단에 이익이 되지만 전체에 해를 끼치는 집단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를 해야 하는데 정치권과 정부가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 고위당국자도 “한전 등 공기업 민영화를 위해 그동안 정부가 수백억원을 들여 10년 가까이 연구해왔는데 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 달도 되지 않아 백지화를 검토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 무척 황당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상태를 방치하면 한국 경제는 ‘남미형 경제’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 시각이다. 1990년대 말 아르헨티나의 메넴 정권은 노동법 개정, 근로자연금 삭감,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했다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에 부닥쳐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이 나라는 수시로 국가부도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우선 파이를 키우자=정부는 소외된 계층을 배려해야 하지만 여기에 너무 신경을 써 성장 잠재력을 위협하면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더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와 함께 국민도 과도한 요구와 주장이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홍기현(洪起玄·경제학) 서울대 교수는 “이제라도 정부는 성장과 분배 관계에서 확실한 선택을 해야 한다”며 “성장은 기업이 하고, 정부는 분배에 신경을 쓰겠다는 안이한 태도를 가지려면 차라리 정부는 모든 경제정책에서 손을 떼라”고 충고했다.

한진희(韓震熙) KDI연구위원은 “지속할 수도 없는 소외계층 배려정책은 기대만 잔뜩 키웠다가 꺼지기 때문에 부작용이 더 많다”고 강조했다.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은 “외국의 예를 보면 재임기간 중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는데 성공한 지도자들의 공통점은 집단이기주의를 용납하지 않고 국민소득을 올리는 데 정책을 집중했다는 점”이라며 “우리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될 때까지는 우선 파이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英, 과감한 노조개혁으로 위기 돌파▼

한국은행은 1인당 국민소득이 1995년 처음으로 1만달러를 넘었다고 96년 3월 발표했다.

두 달 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인당 실질국민소득이 2020년에는 3만2020달러로 세계 32위에서 7위로 뛰어오를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도 내놓았다.

그러나 8년이 지나도록 1인당 명목국민소득은 95년에 비해 단 1달러도 늘어나지 않았고 실질국민소득은 오히려 2000달러 가까이 줄었다.

▽8년 동안 뭘 했나=‘1만달러 돌파’ 후 가장 먼저 찾아온 현상은 ‘샴페인 터뜨리기’였다. “우리도 선진국이 됐으니 이제는 경제성장보다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논의가 무성해졌다. 실력행사를 통한 ‘내 몫 찾기’도 줄을 이었다.

기업들은 수익성을 외면한 채 부동산 매입과 외형 확장 등을 위해 외채를 마구잡이로 끌어다 썼다. 93년 말 438억달러에 불과하던 총외채는 96년 말 3.7배인 1634억달러로 늘었다.

근로자들은 툭하면 생산과 수출을 볼모로 잡고 파업을 벌였다. 96년 1∼9월 노사분규로 인한 생산 및 수출차질액은 1조6144억원과 3억7549만달러. 전년 같은 기간보다 각각 57%와 90%씩 늘어난 규모였다.

노동계의 파업은 96년 말 노동법 개정안 변칙통과를 계기로 더 극단으로 치달았다. 97년 1월에만 생산차질액이 3조원, 수출차질액이 3억1700만달러에 이르렀다.

일반 국민 사이에서는 저축률이 떨어지고 해외여행과 외제 소비가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상수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 첫해인 95년 85억달러 적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데 이어 96년에는 약 3배인 230억달러 적자를 냈다. 그런데도 정부는 “펀더멘털(경제의 기초적 여건)이 튼튼하다”는 말만 늘어놓았다.

1만달러 돌파 3년째인 97년 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듬해 1인당 국민소득은 반 토막에 가까운 6744달러로 떨어졌다. 그 이후는 힘겹게 회복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해외의 승자와 패자=1인당 실질국민소득을 기준으로 1만달러를 넘기자마자 경제위기를 맞은 나라는 한국만은 아니다.

네덜란드 영국 아르헨티나 등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처방과 운명은 달랐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대수술’에 가까운 경제체질 개선을 통해 2만달러 시대를 열었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30년이 지나도록 1만달러 벽을 다시 넘지 못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1만달러 돌파시점인 71년을 전후해 복지 증대와 임금인상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이 70년 6만8000명에서 85년에는 68만명으로 10배 늘었다. 70년부터 79년까지 임금은 매년 8%씩 올랐다.

79년 2만달러를 넘어섰던 네덜란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84년 1만2000달러대로 추락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네덜란드는 △노사의 임금인상 억제 합의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사회보장 지출 축소 △공기업 민영화 등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그 결과 90년대 들어 네덜란드 경제는 ‘네덜란드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최근 다소 주춤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성공사례로 꼽힌다.

영국도 75년 1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위기→극복→재위기→극복 등의 과정을 밟았다. 특히 79년 집권한 대처 총리가 강력한 노조개혁 등을 추진해 80년대 중반부터 1인당 국민소득이 지속적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74년 1만달러를 넘어섰으나 정치적 불안정과 폐쇄경제의 폐단으로 곧 1만달러 아래로 떨어진 뒤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노동시장 유연화, 사회보장제도 및 재정적자 감축, 공기업 민영화 등을 내용으로 한 경제개혁이 몇 차례 시도됐지만 기존 제도의 기득권층과 노조의 반발에 부딪혀 매번 좌절됐다.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김광현 천광암 정미경

이은우 신치영 홍석민

이헌진 고기정 기자(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