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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국민의 정부]3부 DJ노믹스의 명암 ①대우의 몰락

입력 | 2003-07-02 17:36:00

98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에 김회장이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참석해 DJ와 악수하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여권 내에서 공공연히 김우중(金宇中) 회장 퇴진론이 제기되던 1999년 8월 초.

천용택(千容宅) 국가정보원장은 국정원 경제파트에서 올린 보고서를 보며 “김우중이는 진짜 안 되겠다. 손을 봐야 한다”며 흥분했다.

보고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대우가 자구노력의 일환으로 외국자본에 매각한 힐튼호텔은 실제로는 위장 매각한 것이다. DJ정부가 끝나면 연리 5%를 계산해 주고 되사는(buy-back) 조건이다. 더구나 김우중은 호텔 1개 층을 차지하는 자신의 전용 공간을 연간 임대료 1만원에 20년 장기계약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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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호텔 매각을 둘러싸고 이에 반대했던 김우중의 주변에서 흘러나온 이면합의의 내용이 정보기관에 포착된 것이었다는 게 당시 여권 핵심관계자의 설명이다.

보고서가 불러온 파장은 컸다. 그해 5월 말 취임해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에 불타 있던 천용택이 우선 이를 공식적으로 문제 삼고 나섰다.

천용택은 DJ에게 김우중에 대한 강경조치를 건의키로 하고 국정원 관계자들에게 제반 관련 사항을 준비토록 지시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이 같은 움직임은 곧바로 김우중측에 전해졌다. 자신이 구속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김우중은 8월 12일 해외 미수금 회수 협상을 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당시 김우중의 출국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이 DJ정부 핵심에 있었던 A의 설명이다.

“김우중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날아갔다. 자신의 경기고 동창이자, DJ와 가까운 사이인 무기중개상 조풍언(曺豊彦)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우중은 조풍언을 보자마자 들고 온 서류가방을 들춰 보이며 ‘DJ정부에서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97년 대선 때 내가 DJ를 얼마나 도와줬는데, 이럴 수 있느냐. 이런 식으로 하면 나도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고 소리쳤다.”

김우중이 들고 온 서류가방에는 97년 대선 때 대우가 DJ측에 지원한 돈의 명세와 수표 사본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는 것이 A의 전언이다.

조풍언에게 김우중은 자신의 신변을 보장한다는 DJ의 친필 서한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풍언은 곧바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서울행에는 DJ의 3남 김홍걸(金弘傑)도 동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A의 계속되는 증언.

“청와대에서 DJ를 면담한 조풍언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 직후 DJ가 천용택에게 ‘김우중 건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은 사실이다. DJ는 또 김우중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을 써 제3자편에 전달하는 등 김우중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고 들었다.”

일부에서는 97년 대선 때 김우중이 DJ측에 얼마나 많은 자금을 지원했기에 사후 폭로 ‘위협’이 가능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DJ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L은 “민주당 동교동계 S의원이 어디선가 김우중의 대선 지원 액수를 듣고는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며 깜짝 놀라더라. 수백억대는 됐던 모양이다”고 말했다.

아무튼 조풍언을 매개로 한 김우중과 DJ측의 ‘막후 협상’은 일단 김우중에게 숨 돌릴 기회를 줬다.

김우중은 DJ의 배려로 신변 안전이 확인되자 출국 12일 만인 8월 24일 귀국해 다음날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8월 11일 대우 채권단과 대우그룹 간에 체결된 재무구조개선 특별 약정서에 서명을 거부한 채 독자회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97년 대선자금’은 김우중과 대우를 망하게 한 독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대우 해체 과정을 잘 아는 정치권 관계자들의 일반적 시각이다.

김우중의 경기고 동기동창인 이종찬(李鍾贊) 전 국정원장의 설명. “DJ정부 초기 김우중에게 ‘대선자금 낸 것 믿고 회사 줄이지 않으면 크게 다친다. 네가 모범적으로 구조조정을 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김우중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구조조정을 서둘지 않았다. 대우 사람들에게 들으니 김우중은 당시 임원들에게 구조조정을 할 게 아니라 위기를 기회 삼아 공격적으로 경영하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김우중이 대선자금을 믿고 판단 미스한 것이다.”

이와 관련, 김중권(金重權)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DJ는 김우중에 대해 각별했다. 취임 초 ‘김대중이 김우중과 더불어 한국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김우중을 여러 차례 만나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김우중은 믿는 데가 있는지 구조조정보다는 롤오버(채권 만기연장)를 해달라는 말만 하더라”고 설명했다.

DJ는 사실 최대한 대우를 보호하려는 입장에 있었다. 김우중의 신변안전을 약속해준 것도 그 단적인 예였다. 김우중도 마지막 순간까지 DJ의 보호를 기대했다.

김우중은 그해 8월 26일 12개 주력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상황에서도 대우차를 중심으로 몇몇 계열사만은 남겨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오호근(吳浩根·현 라자드아시아 회장)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의 회고.

“대우측 인사가 99년 8월 말에 찾아와 회장(김우중)을 말려 달라고 요청했다. 회장이 청와대만 믿고 집착을 보인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9월 2일 힐튼호텔에 찾아가 김 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대통령도 (워크아웃기업 12개 중) 6개는 남겨주기로 약속했다. 당신도 약속해 달라’고 요구하더라.”

당시 대우그룹 관계자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회장은 10월 11일 유럽 출장을 떠나기 직전 이근영(李瑾榮) 산업은행 총재와의 통화 내용을 전하면서 밝은 표정이었다. 이근영이 ‘잠시 외국에 나가 있으면 계열사를 잘 정리해 자동차 등의 구조조정을 맡기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회장은 또 ‘DJ도 직접 전화를 걸어와 같은 얘기를 하더라’며 기대를 보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10월 20일 중국에서 잠시 귀국했다가 곧바로 출국한 김우중은 다시는 귀국하지 못한 채 외국을 떠도는 신세가 됐다.

김우중의 최후 출국 과정에서도 배후에 국정원이 작용했다는 것이 당시 여권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의 설명. “10월 11일 김우중이 유럽으로 출국한 이후 대우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자 이전부터 김우중을 좋지 않게 보고 있던 국정원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을 통해 김우중을 사법처리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 DJ는 이 건의를 거듭 거부했지만, 일시 귀국했다가 ‘국정원이 사법처리를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우중은 그것이 거부됐다는 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 곧바로 다시 출국했다. 그게 마지막이다.”

국정원이 이처럼 김우중을 ‘견제’한 배경에 대해 이종찬은 “천용택과 김우중은 사이가 좋지 않더라. 천용택이 국방부장관 할 때 대우조선이 하던 잠수함 사업을 현대조선으로 넘겼는데, 양자가 이 일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천용택은 “나는 김우중 문제의 처리와 관련해 아는 바가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당시 국정원이나 청와대측도 “김우중의 몰락은 기본적으로 경제논리 때문이다. 정치상황은 부수적인 문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김우중의 몰락은 강봉균(康奉均)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등 경제정책라인과의 견해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재계의 정설이기도 하다.

김우중은 대선 직후인 98년 1월 DJ를 독대한 자리에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수출 드라이브’를 통해 텅빈 국고를 채우는 길만이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경제관료들의 판단은 전혀 달랐다. 강봉균의 설명. “무차별적인 차입경영을 통해 과잉 중복투자로 몸집을 불려온 재벌과 이들에게 무분별하게 돈을 빌려준 금융권이 외환위기의 주범이었다. 그런데도 김우중은 구조조정에 늑장을 부렸고 해외금융 부담이 큰 대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출금융 규제완화 등을 요구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당시 재벌개혁의 ‘총수’였던 이헌재(李憲宰) 전 금융감독위원장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대우는 병사(病死)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DJ-김우중 '짧은 밀월'▼

1998년 1월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로 들어서는 김우중의 손에는 외환위기 극복의 ‘묘수’가 담긴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다.

당시 DJ에게 김우중이 제시한 ‘500억달러 무역흑자론’은 불필요한 수입을 대폭 줄이고 대기업 중심으로 수출을 크게 늘리면 단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해법이었다. DJ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김우중은 꿰뚫어 봤다.

김우중과 DJ의 직접적 인연은 80년대 후반 DJ가 평민당 총재였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DJ가 대우의 공장 준공 행사 등에 참여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97년 대선과정에서 대우가 은밀히 DJ를 지원한 것이 계기가 됐다.

김우중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된 것 역시 ‘청와대의 의중’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김우중과 DJ의 관계는 밀접했다. DJ는 98년 5∼6월 매주 2, 3번씩 정책 조언을 듣기 위해 김우중을 찾았다.

그러나 이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우중식’ 외환위기 극복책의 문제점과 대우그룹의 어려운 자금사정 및 구조조정 지연문제를 지적하는 보고서가 수없이 DJ에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강봉균(康奉均) 당시 경제수석의 증언.

“김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김 회장이 내놓은 ‘500억달러 무역흑자론’에 솔깃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 실제로 그해 경상수지 흑자가 403억원이나 나기도 했다. 그러나 실체는 김 회장의 주장과 달랐다. 수출은 줄었지만 수입이 더 크게 줄면서 흑자가 났을 뿐이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었다. 98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DJ는 김 회장을 만날 때 반드시 나를 배석시켰다.”

같은 해 12월 16일 베트남 하노이 대우호텔 스위트룸에서 DJ와 이희호(李姬鎬) 여사, 김우중과 부인 정희자(鄭禧子)씨가 조찬을 함께한 자리의 분위기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 정상회담 참석차 베트남을 방문한 DJ를 간신히 만난 김우중은 이 조찬 자리에서 “무역금융 지원을 풀어 자금지원을 해 달라”고 직설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DJ는 “강봉균 경제수석에게 말해보겠다”고 대답했을 뿐이었고, 그 후 실제 지원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둘은 몇 차례 만났지만 99년 여름 이후에는 그 마저도 끊어졌다.

99년 5월 국가정보원장에 취임한 천용택(千容宅)이 ‘김 회장 처리를 서둘러야 한다’고 보고한 이후 DJ는 김우중의 여러 차례 독대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 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