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계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의 하나인 전북 순창군 동계면 장군목에서 5월20일 환경행정협의회 소속 시장 군수와 주민 어린이 등 600여명이 참석해 어린 은어와 자라 등을 풀어 주고 있다.-사진제공 순창군
1일 오후 섬진강 상류인 전북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금천변. 도시에서 온 승용차 두 대가 물가에 차를 대놓고 비누칠까지 해 가며 세차를 하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비치는 맑은 강물 위로 검붉은 기름띠가 번져 나갔다.
이때 부근에서 밭일을 하던 최광식(崔光植·50)씨 등 주민 2명이 뛰어나왔다. 최씨는 섬진강 민간환경감시대원. “강물에 세차하는 것은 안 된다”고 말렸지만 도시인들은 막무가내. 결국 최씨가 “고발하겠다”며 갖고 있던 카메라를 들이댔고, 기세등등했던 운전자들은 “미안하다”며 줄달음쳤다.
지난달 30일 순창에서 160여km 떨어진 전남 광양시 망덕 포구 일대.
수난안전협회 광양지구대원 10여명이 섬진강 하구인 이곳 강바닥에 버려진 그물과 생활 쓰레기 5t 가량을 건져냈다. 그물눈이 촘촘한 불법 어구가 특히 눈에 띄었다. 실뱀장어를 잡기 위해 설치된 것들. 1999년부터 지금까지 섬진강 바닥 쓰레기 정화 작업을 벌이며 수십t의 쓰레기를 건져 올렸지만 여전히 ‘버려진 양심’들이 발견되고 있다.
섬진강의 상류부터 하류까지 ‘섬진강을 살리자’는 주민운동이 불붙고 있다. 순창의 환경감시대원과 광양의 수난안전협회원들이 그들 중 일부다.
280개의 크고 작은 지류를 거느린 섬진강의 물줄기는 장장 212km에 이른다. 걸쳐있는 지역만 3개도 14개 시군에 달한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는 법. 그동안 섬진강은 ‘고통을 감내하며 가족을 지키는 어머니’처럼 주변지역의 오폐수를 힘겹게 자정(自淨)해왔다.
그러나 영호남 지방자치단체들이 힘을 한데 모으면서 섬진강은 ‘새생명’을 얻고 있다. 섬진강 살리기에 나선 자치단체는 영호남의 10개 시군. 이들은 ‘섬진강환경행정협의회’를 만들고 맑은 강물을 되찾기 위해 ‘양보와 협력’을 이뤄내고 있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다.
이 협의회는 민선 지방자치시대 이후 앞 다퉈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기주의’를 대거 바꾸면서 새로운 공동체 모델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으로 섬진강에는 지금 어린아이 팔뚝만한 은어가 잡히고 실뱀장어가 늘어나고 있다. ‘섬진강은 우리 것’이라는 합심이 빚어낸 결과다.
섬진강환경행정협의회는 섬진강의 생태보전과 난개발을 막기 위해 전북 순창군을 비롯해 전남 광양시 순천시, 구례군 곡성군, 경남 남해군 하동군 등 7개 시군과 영산강환경관리청, 한국수자원공사 등이 참여, 97년말 발족했다. 그 후 전북 남원시와 진안군 임실군이 합류했다.
협의회 발족을 처음 제안했던 김옥현(金玉炫·70) 전 광양시장은 “처음에는 각 자치단체가 난색을 표명했다”며 “그러나 상류지역 하수종말처리장 설치, 강바닥 골재 채취 금지와 은어 등 회귀성 어류의 남획 금지 등 실천 가능한 운동을 먼저 시작한 것이 성공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골재 채취 휴식년제는 섬진강 살리기의 출발점이었다. 그동안 대부분 자치단체들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골재 채취사업을 벌였고 이 때문에 물고기들이 산란하거나 살 수 있는 환경이 사라져 버렸다.
협의회는 이에 따라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섬진강 본류 전 지역에서 모든 골재 채취를 금지했다. 섬진강 토종 어종인 은어와 연어 참게 자라 쏘가리 등 250여만 마리를 풀어 섬진강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동참했던 주민들은 “1급수에만 사는 가재와 여름 밤 불을 밝히는 반딧불이가 되살아나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생활하수와 축산 분뇨 정화사업에도 힘을 모았다. 104곳의 마을에 단위 하수처리장이 설치됐고 2008년까지 212곳을 추가 설치키로 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요인을 없애는 것도 목표. 불법적인 어류 포획 장비를 철거하고 수중정화작업도 끊임없이 벌이고 있다. 강 하류에 불법 설치된 그물은 실뱀장어뿐 아니라 농어 돔 참게 새끼까지 마구 잡아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치단체별로 구성된 민간환경감시대는 지금까지 300여t의 쓰레기와 폐기물을 수거했다.
이에 따라 섬진강 수질은 현재 1급수에 가까운 2급수 수준으로 올라섰다. 98년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어린 연어와 은어 250여만 마리를 방류한 결과 연어와 실뱀장어 개체수가 크게 늘어났고 섬진강의 특산물인 재첩(갱조개) 생산량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치단체들은 ‘공동체 의식’이라는 망외의 소득을 얻었다.
순창과 구례에서 연어와 은어 등을 방류하면서 각 지역 주민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만나 우의를 다졌고 시장 군수들의 만남도 잦아졌다. ‘어머니’ 섬진강이 자치단체간 이기주의를 허문 셈이다.
‘뜻’은 모았지만 예산부족은 여전히 문제다. 협의회 소속 10개 시군의 재정자립도는 광양시 등 3개 시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11∼14% 선에 불과하다. 일부 지자체들은 직원 봉급도 주기 어려운 형편이다.
협의회장인 강인형(姜仁馨) 전북 순창군수는 “국내 10대 강 가운데 1급수 수준의 강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섬진강이 완전히 오염된 뒤 되돌리려면 엄청난 예산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오염을 막는 사전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순창=김광오기자 kokim@donga.com
●섬진강은…
섬진강은 원래 사수강 사천 두치강으로 불렸다가 고려 우왕 때 왜구가 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지면서 두꺼비 ‘섬(蟾)’자가 붙어 섬진강이 되었다고 한다. 길이 212.3km로 남북한을 합쳐 아홉 번째, 남한에서는 다섯 번째로 긴 강이다. 공기 좋고
물이 맑아 유난히 장수촌이 많다. 전북 순창군과 전남 곡성 구례 담양군 등 전국에서 고령자 비율이 가장 높은 4개 지역이 이곳에 몰려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280여개의 크고 작은 물줄기를 받아들이며 임실 순창 남원 곡성 구례 하동을 거쳐 광양만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섬진강 유역의 행정 구역은 전북 남원시와
진안 임실 순창 장수군, 전남 순천 광양시와 곡성 담양 화순 보성 장흥 구례군, 경남 하동군 등 3개도 14개 시군에 걸쳐 있다.
강 유역 면적은 남한 면적의 6%선. 강가에 큰 평야가 없고 도시가 발달하지 않아 거주 인구는 82만여명(전국 인구 1.8%)이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전북 순창), 소설가 조정래(전남 순천), 쇼트트랙 선수 김동성(전남 곡성), 경찰청 임상호 차장, 삼성그룹 양인모 부회장(전남 구례), 손길승 전경련회장, 김기재 전 부산시장, 정구영 전 검찰총장(경남 하동) 등이 섬진강 사람들이다.
순창=김광오기자 kokim@donga.com
●섬진강 시인 김용택씨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 쌀밥 같은 토끼풀들 /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김용택 ‘섬진강 1’ 중에서)
섬진강은 시인 김용택(金龍澤·55·전북 임실 덕치초등학교 교사)에게 시의 뿌리이면서 문학적 젖줄이다. 섬진강은 늘 그에게 어머니 같고, 누이 같았다. 그의 첫 시집도 ‘섬진강’(1985년)이었다.
섬진강가인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50대 중반이 되도록 줄곧 섬진강과 살아온 그는 30년 넘게 섬진강이 보이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디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라고 노래한 그의 섬진강 사랑은 마를 줄 모른다. 물속에 사는 자가사리 쏘가리 등 수백종류의 물고기와 참싸리 며느리밥풀꽃 하늘말나리 등 강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들꽃, 빠꾸하나씨 아롱이양반 암재할머니 등 진메마을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의 시와 산문을 통해 오롯이 되살아난다.
섬진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섬진강 되살리기의 정서적 바탕이 되고 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시위를 벌인 적도 있었다. 2001년 11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적성댐 건설안을 철회하라”는 내용의 피켓을 목에 걸고 1인 시위를 벌인 것. 건설교통부가 그의 고향 부근인 순창 동계면에 적성댐을 2011년까지 건설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뒤 댐건설은 잠정 유보됐지만 그 계획은 언제 되살아날지 알 수 없다.
“강이 아름다운 건 물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강 상류에 이미 섬진강댐이 있는데 아랫 동네에 댐을 또 막는다면 섬진강은 머지않아 죽고 말 것입니다.” 그는 섬진강을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임실=김광오기자 ko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