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버리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2004년 봄 , 여름 밀라노 남성복 컬렉션에 선보인 '버버리 프로섬'의 새 디자인들. '버버리 프로섬' 이 겨냥하는 주 고객층은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지난달 22일 오후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대성당) 인근 살라 델레 카리아 티디 박물관에서 열린 ‘버버리 프로섬’ 남성복 컬렉션. 높은 계단으로 이루어진 쇼장 입구에 정렬한 웨이터들은 상큼한 향기가 나는, 살짝 언 물수건을 초청객들에게 나눠주었다. 대부분 기자 혹은 바이어인 초청객들은 세심한 서비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버버리 프로섬’의 쇼가 끝난 뒤 미국의 패션정보사이트 ‘패션와이어데일리’는 이렇게 보도했다.
‘…(남성복) 패션계에는 게이들이 좋아하는 디자이너와 이성애자가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따로 있다. 이들과 또 다른 그룹이 바로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성복 디자이너다. 이들은 여성들이 ‘내 남자’가 입으면 보다 똑똑하고 스타일리시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옷을 디자인한다. ‘그’의 이번 컬렉션은 이런 여성들과 그녀들의 남자친구에 어필했다.’
기사에 언급된 ‘그’는 2001년 7월 서른 살 나이로 영국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크리스토퍼 베일리(32)다.
밀라노의 ‘버버리 프로섬’ 쇼룸에서의 크리스토퍼 베일리. 밀라노=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베일리는 버버리의 이미지 혁신을 위해 97년 만들어진 젊고 고급스러운 라인 ‘버버리 프로섬’, 전통적인 체크무늬를 바탕으로 하는 ‘버버리 런던’ 등 버버리사의 모든 패션 라인들의 기획, 디자인, 컬렉션을 책임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오전, 이탈리아 밀라노의 패션 거리인 몬테나폴레오네 인근 ‘버버리 프로섬’ 쇼룸에서 만난 베일리는 금발에 바싹 마른 몸매였다. 여러 사진에서 접했던 냉소적인 표정 탓에 낯가림이 심한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고대 로마풍의 깨끗하고 웅장한 쇼장이나 시원한 물수건과 샴페인을 제공한 아이디어가 모두 좋았습니다. 옷 자체가 아닌 패션쇼 전반의 기획에도 참여합니까.
“물론이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책은 브랜드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일이에요. 모든 과정이 ‘브랜드 컨셉트’죠. 물수건도 브랜드가 지향하는 친밀한 느낌, 개인 하나하나를 소중히 생각하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설정한 겁니다.”
목선이 길게 파인 편안한 셔츠나 얇은 끈, 몸에 달라붙는 단아한 바지 등이 등장했던 이번 컬렉션의 주제에 대해 그는 “다분히 ‘영국적인 것’이었다”고 답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마네킹 신발을 벗기며) 이런 옥스퍼드 화의 클래식한 끈에서 느껴지는 영국의 전통, 부드럽고 깨끗한 선을 재현하려 노력했어요. 버버리 특유의 스트라이프를 얇고 세련되게 재해석하거나 트렌치코트의 칼라를 부풀리는 식으로 연출했죠.”
베일리는 영국 런던의 유명 디자인 스쿨 RCA(로열 컬리지 오브 아트) 재학 중 미국 디자이너 도나 캐런에게 발탁돼 뉴욕에서 일했고, 톰 포드에게 다시 스카우트돼 밀라노에서 ‘구치’ 기성복 라인 디자이너로 일하는 등 버버리 입사 이전에 이미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2001년 그가 버버리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을 때 갓 서른의 젊은이가 과연 150년 전통의 브랜드를 이끌어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던 패션 비평가들은 몇 년간 그의 컬렉션을 지켜본 뒤 합격점을 주고 있다. 베일리는 도발적이고 치기 어린 디자인을 밀어 붙이는 대신 전통성의 기본 컨셉트를 계승하는 테두리에서 혁신을 시도해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브랜드에 대한 로열티가 높다”는 평을 듣는다.
버버리사가 최근 공개한 2002년 총 매출액은 5억9360만 파운드(약 1조 1872억원). 전년 대비 19% 증가했다. 로즈 마리 브라보라는 걸출한 여성 최고경영자가 전 세계적으로 영업망을 확충하는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는 게 성장의 한 축이라면, 베일리의 디자인이 ‘버버리는 부모님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타파하고 젊은 고객층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점은 또 다른 축이다.
베일리가 디자인 못지않게 중시하는 것은 새로운 소재의 개발이다. 그는 런던과 밀라노에 있는 소재 공장을 틈나는 대로 방문해 장인들과 머리를 맞댄다.
버버리의 창시자 토마스 버버리도 1879년 영국의 눅눅한 기후에 맞춰 방수, 방풍력이 뛰어난 섬유, ‘개버딘’을 개발했다. 당시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는 이 개버딘 코트를 ‘버버리 코트’라 칭했고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버버리코트’는 트렌치코트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인터뷰 도중 직원이 카푸치노와 영국식 과자를 들고 나왔다. 베일리는 서슴없이 과자를 카푸치노에 깊숙이 적셔 한입에 넣었다. 카푸치노에 젖어 보기 좋은 초콜렛색으로 물든 과자가 밀라노 패션계에 성공적으로 몸을 담근 영국인 베일리를 상징하는 듯 했다.
“전 일 년의 대부분을 런던과 밀라노에서 보내요. 밀라노가 음식, 사람, 날씨가 좋은 작은 마을 같다면 런던은 역동적인 코스모폴리스죠.”
버버리는 지난해 7월, 영국의 럭셔리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영국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주주나 경영진의 간섭이 심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창의력을 발휘해야하는 디자이너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아니예요. 상업적으로 성공한 모든 브랜드의 파워는 창조력에 있습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회사 내 결정권자들도 잘 알고 있지요.”
그가 생각하는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물었다.
“누가 알겠어요.(웃음) 그렇지만 분명히 디자인 분야에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패션 디자인이 아닐 수도 있죠. 저는 도전을 좋아하니까….”
밀라노=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