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 쇼를 통해 일본 시장 진출에 성공한 ‘큰 귀 토끼'
큰 귀 토끼, 스핀버드, 팅구, 마린블루스, 멍크….
아직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캐릭터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 캐릭터들이 한국의 수출 ‘효자상품’으로 떠오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싶다. 이들 캐릭터는 6월10일부터 12일까지 뉴욕의 제이콥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캐릭터 전시회인 ‘라이센싱 2003’(일명 ‘리마 쇼’)에서 수출이 성사되거나 계약 단계에 이른 한국 캐릭터들이다. 이들은 모두 국내 중소기업들이 자체 개발한 것이다.
‘내 친구 큰 귀 토끼’를 제작한 담덕C&A는 일본 에이전시와 ‘큰 귀 토끼’와 ‘스핀버드’ 등의 판권을 계약해 총 575만 달러의 계약 실적을 올려 이번 리마 쇼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거뒀다. 이외에 고려라이센싱그룹과 킴스라이센싱 등도 리마 쇼에서 각기 104만 달러의 수출 실적과 800만 달러의 상담 실적을 올렸다. 이번 리마 쇼에서 한국 업체들이 거둔 성과는 수출계약 600만 달러, 상담 실적 5000만 달러에 이른다.
하나의 캐릭터가 올리는 매출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1940년 탄생한 ‘톰과 제리’ 캐릭터는 지금까지 100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국내에서도 캐릭터의 부가가치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미국 캐릭터인 ‘스누피’의 라이선스 상품만도 1000여 가지에 달할 정도다.
◇ ‘톰과 제리’ 1000억 달러 매출
애니메이션 ‘담덕이야기’의 주인공들(왼쪽). 자사 캐릭터들을 들고 포즈를 취한 담덕C&A 강원식 대표.
최근까지 국내 캐릭터 시장은 푸우, 스누피, 헬로 키티 등 외국산 캐릭터가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수한 국내 캐릭터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시장이 국산 캐릭터 중심으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는 국내 캐릭터의 시장점유율을 30% 내외로 추산한다. 마시마로, 뿌까, 얌, 블루 베어 등이 성공작으로 평가받는 국산 캐릭터들.
그러나 한국 캐릭터들은 국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해외 진출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문구나 인형 등 일부 캐릭터 상품이 미국 시장에 수출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교포사회에서 팔리는 데에 그쳤다. 일본이나 동남아 시장 역시 마찬가지. 동남아와 중국의 경우, ‘한류 열풍’을 타고 한국의 캐릭터 상품을 수입하려는 업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동남아 시장은 불법 복제와 계약 불이행 등이 잦아 한국의 에이전트들이 오히려 계약을 꺼리는 상황이다. 동남아에서 제작된 불법 복제품들이 국내에 거꾸로 수입되어 시장을 악화시키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캐릭터 제작자와 에이전트들은 미국과 유럽, 그중에서도 세계 최대의 캐릭터 시장인 미국 진출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몇몇 업체들은 2001년부터 독자적으로 리마 쇼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원장 서병문, 이하 진흥원)은 지난해와 올해 리마 쇼에 한국의 독립 부스를 설치했다. 진흥원 후원으로 지난해부터 리마 쇼에 참가한 업체들이 드디어 올해 무더기로 수출계약에 성공한 것이다. 진흥원측은 한국 캐릭터의 본격적인 미국 진출을 위해 올해 9월에 LA 현지사무소를 설립할 예정이다.
사실 한국 캐릭터의 해외 진출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다. ‘USA 투데이’지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 리마 쇼에서는 기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을 캐릭터로 재창조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그만큼 참신한 캐릭터가 드물다는 뜻이다.
마린블루스(왼쪽)와 팅구(아래)도 올해 리마 쇼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팅구는 이미 독일 등 유럽 지역에서 모바일 서비스로 상용화된 상태.
“현재 미국 시장에서는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미국에서 제작된 캐릭터의 인기가 시들한 반면, 새로운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틈을 타고 헬로 키티 등 일본 캐릭터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죠. 그런데 리마 쇼에 참가한 미국 관계자들에게 우리 캐릭터인 뿌까를 보여주니 모두들 ‘키티보다 뿌까가 낫다’고 평가하더군요.” 진흥원 엄윤상 팀장의 말이다. 3년째 리마 쇼에 참가하고 있는 킴스라이센싱의 박정진 부장 역시 “올해 리마 쇼에서는 비로소 ‘한국에도 캐릭터가 있구나’ 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고 달라진 상황을 전했다.
문제는 한국 캐릭터가 디자인, 상품제작 수준 등에서 우수한 데에 비해 디자인의 다양성이나 후반 작업에서 처진다는 점. “한국 캐릭터들은 모두 예쁘거나 엽기적입니다. 이 외에 다른 경향이 없다는 것이 현지 업체들의 평가였어요. 어딘지 모르게 똑같아 보인다는 거죠. 또 한국 캐릭터는 파스텔톤 색상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외국 정서에 맞추려면 선명한 원색을 쓰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조태봉 고려라이센싱그룹 대표의 분석이다.
◇ 예쁜 이미지보다 독특한 생명력 필수
캐릭터의 후반 작업, 즉 상품성을 강화하는 작업에서 취약하다는 것도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하나의 캐릭터를 상품으로 팔기 위해서는 다양한 응용작업, 마케팅 플랜과 조직적 홍보, 브랜드 관리 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 한국 캐릭터는 현저히 열세라는 것.
특히 캐릭터가 단순히 ‘예쁜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캐릭터의 독특한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미키마우스, 푸우, 스누피, 헬로 키티, 아톰 등 30~70년씩 변함없는 인기를 얻고 있는 캐릭터들은 시간과 유행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는 등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 소비자는 캐릭터를 장난감이나 인형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친구’처럼 여기게 된다.
리마 쇼에 설치된 한국의 독립 부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중소기업인 ‘담덕C&A’의 도전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 회사는 고구려의 신화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담덕이야기’를 제작하는 동시에, 애니메이션 속의 등장인물들을 캐릭터로 개발하는 방식을 택했다. ‘담덕’이라는 회사명부터가 광개토대왕의 아명이다. 현재 ‘담덕이야기’는 26편의 TV시리즈 시놉시스가 나와 있는 상태. 주인공인 담덕 외에도 다리가 세 개 달린 까마귀인 ‘자오’, 금개구리 ‘금와’ 등 신화 속 동물들이 모두 독자적인 캐릭터로 개발되어 있다.
“좋은 캐릭터는 교육과 오락의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그래서 ‘큰 귀 토끼’는 여행을 통
해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모습으로, 또 ‘스핀 버드’는 바쁘게 꿀을 찾다 빌딩 유리창에 부딪힌 벌새를 컨셉트로 디자인했습니다. 두 캐릭터는 각기 열등감이 있는 어린이들과 일에 지친 20대 직장여성을 모델로 하고 있죠. 정말 뛰어난 캐릭터는 소비자에게 동질감과 위로까지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담덕C&A 강원식 대표의 설명이다. 강대표는 큰 귀 토끼와 스핀버드가 이 같은 독자적 컨셉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시장 수출에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의류부터 패션, 문구, 인형, 교육자료, 애니메이션 등 무한대의 영역을 자랑하는 캐릭터 산업은 그야말로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의 전형이다. 최근 들어 게임과 모바일로 다시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캐릭터 산업. 이제 우리도 그 무한대의 세계시장에 조심스레, 그러나 당당히 첫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전원경 주간동아 기자 winni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