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나이에 그림 배우기를 시작해 칠순을 앞두고 첫 개인전을 준비 중인 유은열 할머니가 자신의 그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고양=이동영기자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에 사는 아마추어 화가 유은열 할머니는 올해 칠순이다. 자녀들은 잔치를 계획하고 있지만 유씨는 남편이 저세상으로 먼저 떠났는데 잔칫상을 받기 싫다며 거부하고 있다. 대신 생일에 맞춰 10월에 첫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그가 처음으로 붓을 잡은 것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1992년 9월.
막내며느리는 남편과 자녀 뒷바라지로 평생을 보낸 그가 허무함에 휩싸일 것을 걱정해 그림 배우기를 권했다. 어릴 적 화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며느리 손에 이끌려 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모 대학 교직원으로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남편을 추모하기 위해 수련을 소재로 한 첫 작품을 들고 묘지로 갔다. 남편이 사망한 지 100일이 되던 날이었다. 그는 남편에게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태워 하늘나라에 보냈고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남편은 학교에서 인정받았어요. 남편을 보내고 나서 ‘나도 당신처럼 유능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 이름을 남기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했어요.”
그림 실력이 늘어 50호 이상의 대작(大作)도 그리기 시작할 무렵인 94년 10월 그는 뇌출혈로 대수술을 받고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정신도 온전치 않았지만 자녀들의 헌신적인 간호와 재활 덕분에 1년 정도 지난 후에는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아 유화(油畵)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녀들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어머니의 강한 열망이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씨는 밤낮없이 자신을 정성으로 간병한 자녀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의 그림은 수련 국화 등 꽃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어릴 적 친구와 손잡고 산길 따라 가던 등굣길,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 손자 손녀의 모습 등도 주요 소재다.
그는 일주일에 이틀은 프로 화가의 화실을 찾아 세밀한 표현기법을 배운다. 또 집에 마련한 아틀리에에서 하루 4시간 이상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그동안 그린 작품은 150여점. 이 가운데 20여점을 골라 10월 일산의 한 백화점 내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그러나 전시회에서 그림을 팔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 그림을 보고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면 그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려주어야죠. 나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그림이 다시 남에게 희망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값진 일이잖아요.”
유씨는 황혼의 나이에 접어들어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마음속 열정을 표현할 수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며 생이 다하는 날까지 캔버스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양=이동영기자 arg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