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거제도에서 발생한 대우조선 노사분규는 우리나라 과격 노동운동의 효시에 해당한다. 당시 근로자들에게 점령된 옥포만은 치안부재 상황에 빠졌고 근로자 한 명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혼란은 극에 달했다. 개발경제 시대의 희생계층인 근로자들이 6·29선언 이후 일시에 욕구를 분출하면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그 시절 근로자들의 선봉에서 투쟁을 격려했던 인물은 바로 ‘노무현 변호사’였다. 그로부터 14년, ‘노동운동의 대부’는 오늘날 범국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불법 노동운동에 대처해야 하는 국가원수가 되었다. 기업과 권력에 대한 공격자에서 이제는 국가의 이익과 정부의 권위를 지켜야 하는 수비자로 역할이 변한 것이다.
▼투쟁선봉서 국가원수로 攻守전환 ▼
정치에서 집권만큼 극적인 공수(攻守)전환도 없다. 국가 최고 권력인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 더 이상 공격해 얻을 것이 없고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도전으로부터 국가와 정권을 수호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새 자리가 요구하는 수비임무에 얼마나 신속하게 적응하느냐 하는 것은 대통령의 성패를 결정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태생적으로 투쟁적인 사람은 수비 상황에서도 과거의 공격자적 성향을 버리지 못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공격받을 때 과민반응하고 자신의 잘못을 상대 탓으로 돌리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바로 공수를 신속하게 전환하지 못해 실패한 정권의 책임자들이다. 야당 지도자로서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보냈던 두 사람은 대통령 취임 후에도 공격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적을 만들어 싸움을 계속하다가 너그러운 대통령상(像)을 심어주는 데 실패했다. 예컨대 DJ는 언론을 적대시하고 공격에 나섰다가 여론과 맞서게 되었으며 그가 이끌던 정당은 포용력 있는 여당으로의 체질변화를 거부한 채 사납게 야당을 몰아치다가 임기 내내 정쟁만 양산했을 뿐이다.
상반된 경우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대정부 투쟁 중 가장 공격적 행동인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후 그는 재빨리 권력의 철옹성을 쌓아 수비에 치중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독재자’는 기이하게도 두 민주투사보다 여론의 지지도가 더 높은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노 대통령의 경우는 어떤가. 안타깝게도 취임 후 4개월 동안(더 거슬러 올라가면 당선 직후부터), 그는 재야시절의 공격 관성에서 쉽게 탈피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수비에 나선 경우가 있다면 측근과 인척의 비리의혹 사건 때뿐이었을 것이다. 미국과 일부 비판적 언론은 그의 단골 공격 대상이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최소한 외양상으로 미국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최근 약간의 변화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공격대상 집단으로 남겨져 있는 듯하다. 이 같은 좌표선정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어떻게 작용할지는 훗날 역사가 평가할 문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 대통령에게 있어 지금은 대우조선 노사분규 현장에서 고함지르고 국회 청문회에서 명패를 내팽개치던 공격의 계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노 대통령에게서 최근 희망을 읽게 하는 일이 있었다. 철도파업 때 그가 노조에 보여준 단호한 자세가 그것이다. 흡사 월드컵 우승팀의 공격수가 신속하게 최전방 수비수로 변신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직업관료 출신 경제 장관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불법파업에 초지일관 원칙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한 의외의 ‘전술’에 놀란 국민이 많다.
▼득점욕망 누르고 수비자리 지켜야 ▼
이번 사태에서 노 대통령이 보여준 명수비는 임기가 까마득하게 남은 지금, 취임 초반의 시행착오를 상쇄하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끝맺음할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화려했던 공격자 시대의 향수 때문에 정책이 일관성을 잃는다면 그런 기대는 헛된 꿈이 되고 말 것이다. 공격에 치우치면 수비는 허술해지는 법이다. 노 대통령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스스로 득점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수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노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서처럼 여론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