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은 1975년 말 미국 하버드대학 석사과정 수료를 몇 달 앞둔 정재석(丁渽錫) 전 건설부 차관을 갑자기 호출했다. 정 전 차관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연락을 받고 영문도 모른 채 급히 귀국했다.
정 전 차관은 긴급히 설립된 중동문제연구소의 소장으로 발탁됐다. 중동의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는 방안을 찾는 것이 이 연구소의 주요 임무. 중동문제연구소는 나중에 산업연구원(KIET)으로 확대 발전한다.
‘잘 살아보세’를 내세우며 경제개발을 이끈 박정희 정권. KIET는 이렇게 ‘경제성장의 신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태어났다.
KIET는 기업과 정부, 경제의 큰 그림(거시경제)과 실물 산업(미시경제)의 접점에서 조화로운 산업 전략을 짜는 국책연구기관이다. 이곳 두뇌들이 세계지도 앞에 모였다. 왼쪽부터 김용열 실장, 장윤종 부원장, 하병기 실장, 박중구 실장, 양현봉 실장, 구문모 실장, 김화섭 실장, 박형진 실장, 김도훈 실장, 김휘석 소장. 박영대기자
▽KIET는 경제성장의 증인=중동문제연구소는 77년 국제경제연구원으로 바뀐다. ‘세계 속의 한국’을 강조하며 수출다변화 정책을 이끈다. 국가별 편람을 만든 것도 이때쯤.
전두환(全斗煥) 정권도 KIET의 역사에 군사정권의 색깔과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동시에 반영시켰다. 전 전 대통령은 국제경제연구원을 개편하면서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이란 이름을 직접 선택했다.
처음에는 한국산업경제연구원이었는데 전 전 대통령이 기술이란 용어를 삽입한 것.
개원 초기 연구원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전 전 대통령은 선진기술 도입을 군사작전처럼 생각한 것 같다. 기술을 기밀이나 첩보의 개념으로 보았다는 얘기다. 선진기술을 적극 들여와야 한다는 뜻으로 연구원 명칭에 기술을 삽입했다”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은 해외공관장회의를 KIET 회의실에서 갖도록 해 해외에서 얻은 정보를 KIET에 풀어놓도록 했다. 그가 내세운 국정과제는 선진조국 창조.
해외공관장회의가 KIET에서 열리고 ‘통치권자의 애정이 닿는 기관’이라는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국책연구원이라고는 한국개발연구원(KDI)과 KIET밖에 없던 시절, 기술 도입과 주력 산업 선정은 물론 기업의 해외 전략을 주로 KIET가 맡았다.
노태우(盧泰愚) 정권이 북방정책을 내세우며 공산권으로 눈을 돌렸다. 이에 따라 KIET에는 북방경제연구센터가 마련됐다. 러시아 중국과 경제협력이 연구과제였다.
김영삼(金泳三) 정권의 어젠다는 ‘세계화’ ‘개방화’. 이 같은 분위기 탓에 정부 주도의 전략업종 선정과 육성을 연구했던 KIET의 기세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들어선 후 KIET는 중소·벤처기업실과 지식산업실이 새로 만들어지거나 개편됐다. 남북경제협력 연구도 강화해 벤처 육성과 햇볕정책을 반영했다.
KIET는 올 6월 ‘국가균형발전연구센터’를 출범시켰다. ‘지역’과 ‘균형’의 개념이 산업전략과 연결돼 어떤 성과를 낳을까.
▽산업정책, 전환의 기로=84년 산업연구원으로 명칭이 바뀌면서부터 KIET는 위력을 조금씩 잃어간다.
정부의 산업정책이 업종별 직접통제 정책에서 인력양성 연구개발 정보수집 시장활성화 등 기능별 정책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개방 논쟁이 거세게 일었다. 미국이 개방을 요구하고 정부 내에서도 개방주의가 힘을 얻었다. KIET는 여기에 맞서 ‘아직 개방하기에는 국내 산업이 취약하다’는 주장을 폈지만 역부족이었다.
90년대 자유화·개방화 추세가 뚜렷해지면서 산업정책은 정체성 위기를 맞는다. 개별 산업은 시장과 기업에 맡겨놓으라는 흐름에 따라 상공부가 힘을 잃어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한 KIET의 입장은 분명하다.
“정부와 기업의 중간에 서서 정부가 보지 못하는 산업의 현장을 살피고 기업이 놓치기 쉬운 경제의 균형 발전 전략을 누군가 제시해야 합니다.”(장석인·張錫仁 지식산업실장)
“국가적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투자효과가 높은 산업과 기업을 찾고 그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하병기·河炳基 연구조정실장)
KIET는 93년 첨단산업 육성을, 98년에는 지식기반 경제를 국내에선 한발 앞서 주창했다. 차세대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것도 KIET의 과제.
하병기 연구조정실장은 “산업이 복잡해지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산업전략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KIET 두뇌=2000년 7월부터 KIET를 이끌어온 배광선(裵光宣) 원장은 이달 임기가 끝난다. 78년 입사한 연구원 출신. ‘배 사장’으로 불릴 정도로 예산 확보 등 연구원 살림에 주력하며 연구원들의 연구 여건을 개선하는 데 애썼다.
24일 신임 원장에 취임하는 한덕수(韓悳洙)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산업 통상 등 실물경제에 정통하다. KIET는 한 원장의 취임으로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장윤종(張允鍾) 부원장은 2001년 43세 때 부원장으로 발탁됐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본다. 김영삼 정부 때 ‘경쟁력강화기획단’에서 활동해 관계에 발이 넓고 외국인투자 분야에 밝다.
하 연구조정실장은 조정 능력이 뛰어나 장 부원장의 추진력과 조화를 이룬다. 99년 발간한 ‘규제개혁의 경제적 분석’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국 규제개혁 보고서’에 인용되기도 했다.
김휘석(金徽碩) 국가균형발전센터 소장은 ‘서비스산업 전도사’로 통한다. 문화 의료 교육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서비스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학부 때 수의학을 전공했다. 지역산업실을 개편해 국가균형발전연구센터를 직접 만들었다.
장석인 지식산업실장은 99년 ‘창조적 지식국가론’ 등을 발간하며 한국에 지식기반산업의 개념을 확산시켰다. 산업혁신에 이해가 깊다.
박형진(朴亨鎭) 디지털경제실장은 산업·무역과 거시경제의 연계성을 파악하는 데 정통하다.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새로운 일반균형분석 모형을 도입해 주목을 받았다.
구문모(具文謨) 서비스산업실장은 산업자원부는 물론 문화관광부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문화산업 연구의 개척자인 까닭. 시청각서비스 분야 도하개발어젠다(DDA) 연구로 관심을 끌고 있다.
김도훈(金道薰) 산업정책실장은 무역정책 및 통상전문가. 통상산업부 자문관, OECD 무역국 파견근무 등을 거쳤다. 통상 환경 변화에 따른 산업별 영향 분석에 주력했다. 등산을 좋아해 별명이 ‘북한산 다람쥐’.
김용열(金龍烈) 기업정책실장은 대기업 정책 전문가로 정부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양현봉(梁炫奉) 중소벤처기업실장은 DJ노믹스의 이론가로, 김화섭(金化燮) 해외산업실장은 스포츠마케팅의 전략가로 통한다. 박중구(朴重球) 산업동향분석실장은 차세대 성장동력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KIET 조직문화 ▼
KIET 연구원들은 ‘실물경제의 총본산’이란 말을 좋아한다.
재정경제부나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경제성장의 큰 목표(거시경제)를 계획한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산업(실물경제) 전략은 KIET의 몫이라는 얘기다.
현장 감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KIET는 언뜻 보면 증권사의 리서치센터와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대부분 업종과 산업을 다룬다. 철강 조선 자동차 등 주력 기간산업에서 문화콘텐츠 지식서비스 바이오 정보기술 등 미래산업을 아우른다.
기업 탐방과 인터뷰를 통해 현장을 익히는 것도 KIET 조직문화의 한 특성.
업종별 전문가들과 전략가들이 쉽게 한자리에 모여 산업 전반을 파악하는 것도 증권사 리서치센터와 닮았다.
차이라면 KIET는 연구의 목적이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점.
이 때문에 지역산업 육성과 국가 균형발전, 지식·디지털·서비스산업, 외국과의 산업별 협력, 중소 벤처기업, 산업인력, 기업 구조조정과 민영화 등의 연구를 하고 있다.
KIET 소속원은 143명. 이 중 110명이 연구위원이며 박사만 61명이다.
KIET에서 잔뼈가 굵은 연구원의 비율이 높다. 학부나 석사과정을 마치고 KIET에 들어와 연구원의 지원으로 해외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박사들이 많다.
연구위원급 이상 해외 박사학위 소지자 35명 중 23명이 KIET에 입사한 뒤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 동료끼리 호흡이 잘 맞는다. 87년 국책연구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노조가 설립됐다.
한 우물만 판 업종 전문가들이 많다. 맡은 분야의 경력이 가장 짧은 정은미(丁銀美) 연구위원이 철강 및 소재업종을 12년이나 맡았을 정도. 웬만하면 전문분야 경력이 20년을 넘는다.
하병기 연구조정실장은 “서로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어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