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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국민의 정부]3부 ②투신사 구조조정 무산

입력 | 2003-07-09 17:38:00

8·12조치가 발표된 후인 2000년 3월 전국 500여개의 신용협동조합 관계자들이 서울 을지로에 있는 한 증권사 객장에 들어가 대우채 환매비율을 높일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다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을 초래한 외환위기로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져들던 1998년 5월 어느 일요일 오전.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관계부처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던 서울 강남구 역삼동 태원빌딩 내의 예금보험공사 사무실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금융감독위원회에서 금융구조조정을 맡고 있던 A씨는 한참 뜸을 들이다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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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정상화가 어려운 투자신탁회사의 부실 문제를 더 이상 덮어둘 수 없습니다. 긴급재정명령을 내려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을 1주일 정도 문을 닫고서라도 투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투자신탁은 기업이 발행해 돈을 조달하는 회사채를 사 주는 주요 기관투자가인 동시에 주식시장이 어려울 때는 주식을 사들여 증시를 안정시키는 안전판 역할도 한다. 그런 만큼 투신의 정상화는 금융시장 안정의 중요한 전제이기도 했다.

아무튼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그의 말이 이어지자 참석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긴급재정명령이란 경제에 있어 비상계엄령과 같은 것. 72년 사채(私債)를 동결했던 ‘8·3조치’와 93년 8월 13일 전격 시행된 금융실명제처럼 비상시국에서나 발동되는 극약조치다. 게다가 증시의 문까지 닫아야 한다는 발상은 참석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금융)시장이 무너지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재정경제부 B국장이 반론을 폈다.

“종합주가지수는 이미 350선으로 떨어졌고 회사채 수익률은 연 30%를 넘었습니다. 충격이야 있겠지만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시장이 얼마나 더 망가지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부실요인을 없애고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참석자들의 표정은 모두 굳어졌다. 한국은행을 대표해 참석한 박철 부총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날 회의는 결국 ‘해야 한다’는 금감위와 ‘할 수 없다’는 재경부 및 예보의 의견이 엇갈려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났다. 다음날 회의 결과를 보고받은 이헌재(李憲宰) 금감위원장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다.

98년 4월부터 약 2개월간에 걸쳐 극비리에 만들어졌던 ‘홍길동Ⅱ’(투신사 구조조정 방안을 담은 보고서 제목, 은행 구조조정 방안 보고서는 홍길동Ⅰ이었음)는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금감위 A씨의 증언. “당시 한국·대한·국민(현 현대)투신의 채권형 수익증권은 30조원 정도였고 6조원만 투입하면 세 투신사를 정상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때 세 투신사를 정상화했더라면 1년 뒤에 터진 ‘대우채 문제’도 안 생겼을 것이며 공적자금 투입도 3분의 1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전 위원장은 이에 대해 “당시 한남투신에서 환매사태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응방안(시나리오) 중 하나로 그런 방안도 나왔던 것뿐이었다. 현대투신이 한남투신을 인수함으로써 환매사태가 진정됐기 때문에 굳이 그런 비상대책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명했다.

아무튼 그로부터 7개월여가 지난 99년 상반기에도 부실 투신사를 정리하려는 시도가 다시 있었다.

금융감독원 이종구(李鍾九) 감사의 증언. “대통령 비서관으로 있다가 99년 1월 금감위로 옮긴 직후 공적자금을 투입해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의 부실을 처리한 뒤 합병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했다. 이 위원장이 투신사 정리를 고민하며 몇 차례 자문하기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진언했다. 세계은행(IBRD)과 조윤제(趙潤濟·현 대통령경제보좌관) 서강대 지역대학원 교수에게도 용역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도도 다시 불발됐다. 당시 이헌재 위원장이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이 전 위원장은 “당시는 주가가 상승세를 지속해 투신사 경영도 개선되고 있었다. 경영이 좋아지고 있는데 구조조정을 한다고 흔들어 놓는 것은 바보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실 투신사 정리는 단순히 경제논리로만 결정될 일이 아니었다. 실제 당시 청와대 경제팀에서는 “총선(2000년 4월)을 앞두고 금융시장을 쑤셔 놓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재경부 고위 간부였던 A씨의 회고. “투신에 손을 대면 아마 전국 방방곡곡에서 곡(哭)하는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노벨상도 받아야 했고요. 내놓고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서로 양해를 한 셈이지요.”

두 차례나 무산된 부실 투신사 정리는 99년 7월 19일 대우그룹이 워크아웃(기업개선조치)에 들어가면서 완전히 물 건너 갔다. 대우그룹의 워크아웃으로 40조원에 이르는 대우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떠안고 있던 투신사로서는 당장 대규모 환매사태가 닥쳐올 위기상황에 빠졌고 부실 투신사를 정리할 여력마저 상실하게 됐기 때문이다 .

투신사의 부실은 금융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대우채권이 들어 있는 수익증권을 당장 찾으면 50%만 주고 3개월 후에는 80%, 6개월 뒤에는 95%를 보장한다’는 ‘8·12대책’으로 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이 같은 부실을 메워 주기 위해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에 2차례에 걸쳐 7조9000억원이라는 공적자금이 투입됐던 것이다.

금감위 김석동(金錫東) 감독정책1국장의 설명. “당시 270조원에 이르는 수익증권의 환매를 막지 않고선 금융시장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보고 이 위원장에게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금지’라는 비상조치를 긴급 건의했다. 대우채권이 들어 있는 수익증권을 6개월 뒤에 찾으면 95%를 보장한다고 한 것은 이 위원장이 대우그룹 구조조정을 하는 데 6개월이 걸리니까 그동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시장을 안정시키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었다.”

반면 재경부 고위직을 지낸 E씨는 이와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이 위원장이 불러서 갔더니 ‘50%, 80%, 95% 보장’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투신사 수익증권의 원금을 보장하는 것은 구조조정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이 위원장도 동의하기에 내 생각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발표된 것은 내가 얘기한 것과 달랐다.”

이 전 위원장은 이후 2000년 1월, 재경부 장관으로 ‘영전’했다가 2000년 8월 물러났고 투신사의 구조조정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이 전 위원장은 투신사 구조조정이 무산된 데 대해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8월 15일 광복절 축사에서 구조조정이 끝났다고 선언함으로써 내 역할은 사실상 끝났다”며 “2000년 6∼12월에 투신뿐만 아니라 은행을 포함한 2단계 금융구조조정을 했어야 했지만 금융노련이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정부가 구조조정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해명했다.

아무튼 재경부 장관으로 옮긴 그는 2000년 4월, 금감위가 의욕적으로 준비하던 ‘금융·기업구조조정 어떻게 이뤄졌나’라는 제목의 백서(白書) 출간을 보류시켰다. “총선을 앞두고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지만 백서를 낼 만큼 구조조정이 만족스럽게 이뤄지지 못한 것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재경부 안팎에서 나돌았다.

이처럼 ‘국민의 정부’ 내내 항상 뜨거운 감자였던 투신사 정리 문제는 칼을 대 부실을 털어내려는 실무자의 ‘원칙론’과 시장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고위층의 ‘현실론’이 맞설 때마다 항상 현실론에 밀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밀어낸 셈이었다.

부실 투신문제는 여전히 한국 금융시장과 경제의 불안요소로 남아 있다. 7조9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한국·대한투신은 아직도 최소한 3조원 이상의 공적자금이 추가 투입돼야 한다는 게 금융전문가들의 분석. 3년 이상 해외매각에 명운을 걸고 있는 현대투신도 푸르덴셜측과 협상을 벌이고 있으나 여의치 않고, 제일투신증권 동양오리온투신증권도 여전히 부실에 시달리고 있다.

▼1999년 '8·12조치' 전말▼

99년 8월 12일, 금융감독위원회는 대우그룹이 7월 19일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 몰려드는 대량의 수익증권 환매를 막기 위한 ‘8·12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은 수립 단계부터 금감위와 재정경제부 청와대 사이에 의견 차이가 컸다. 금감위는 처음부터 대량 환매사태를 막기 위해선 환매를 금지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대책을 마련했다.

같은 해 7월 25일, 금감위 김석동 감독정책과장(현 감독정책1국장)은 당시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재가를 받고 이병래 이명호 사무관과 함께 비장한 각오로 짐을 꾸렸다. 그들이 남의 눈을 피해 들어간 곳은 서울 여의도에 있는 만하탄호텔. 금융감독원 강병호 부원장과 신해용 국장, 그리고 대한투신과 삼성투신에서 투신 업무를 가장 잘 아는 직원 2명도 비밀리에 징발됐다.

그들은 3박4일 동안 외출도 금지된 상태에서 ‘수익증권 환매금지’ 방안을 마련했다. 8월 1일을 D데이로 잡아 정규영업이 끝난 오후 4시에 금감원 직원이 투신사로 일제히 들어가 전산망을 장악한다는 도상 훈련까지 했다.

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환매금지 조치는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을 만나 예정보다 12일이나 지연됐다. 재경부와 청와대가 금감위의 ‘수익증권 환매금지’ 방안이 ‘재산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이후 수익증권 대량 환매사태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는 게 재경부와 청와대의 논리였다.

그러나 8월 7일부터 우려했던 인출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청와대는 환매금지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지만 재경부는 끝까지 반대했다.

8월 12일, 엄낙용 재경부 차관이 ‘환매금지 반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위원장 집무실을 찾아왔다. 한창 설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강봉균 재경부 장관으로부터 반대의사를 꺾으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더 이상 시장붕괴를 감내하기 어렵다고 본 청와대가 찬성쪽으로 방향을 틀자 재경부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72년 ‘8·3사채동결조치’에 버금가는 혁명적 조치로 평가됐던 ‘8·12조치’는 이렇게 결정됐다.

▼투자신탁 연혁▼

1968년:한국투자공사 설립

1974년:한국투자신탁 설립

1977년:한국투자공사, 증권감독원과 대한투자신탁으로 분리

1989년:12·12 증시부양조치―투신 한은으로부터 2조7000억원을 차입해 주식매입함으로써 부실 본격화

1990년:제일 동양 중앙 한남 신세기 등 5개 지방투신사 설립

1997∼98년:지방투신사 정리

(제일→제일제당, 동양→삼성생명, 중앙→동양, 신세기→한국투신, 한남→현대투신)

1999년:8·12 대책-대우채 환매금지

1999∼2000년:한국·대한 투신에 공적자금 7조 9000억원 투입

2000∼:현대투신 해외매각 협상(1차 AIG, 2차 푸르덴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