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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달러서 주저앉나]성장동력이 무너진다

입력 | 2003-07-09 18:53:00


“중국과 한국의 휴대전화 제조기술 격차는 6개월 정도다. 중저가 제품은 조만간 중국이 싹쓸이할 수도 있다.”(팬택&큐리텔 IR 담당자)

“TV나 에어컨 같은 가전제품은 이미 중국이 한국과 비슷한 기술수준까지 왔다. 한국 제품이 아직은 브랜드 가치나 디자인이 뛰어나 고가(高價)에 팔리지만 중국이 디자인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엄청난 투자를 해 언제 역전될지 모른다.”(삼성전자 홍보담당자)

▼연재물 목록▼

- 지도층 도덕해이
- 인재가 떠나간다
- 투자 개방 엇박자
- 정치는 5000달러 수준
- 하향 평준화의 덫
- '2030'세대 과소비 거품
- 노조 강경투쟁의 그늘
- '내몫 챙기기' 집단신드롬

자기 기업이나 제품의 뛰어난 점을 주로 내세우는 홍보팀과 투자설명(IR)팀의 ‘냉혹한 진단’이다. 더구나 이 두 기업은 최근 전반적 경기침체 속에서도 쌩쌩 달리고 있는 우량기업이다. 한국의 ‘수출 효자 상품’으로 기술력도 높다는 평가를 받는 휴대전화와 전자산업이 이 정도라면 다른 산업이 느끼는 위기감은 말할 것도 없다.

▽주력 상품도 방심 못해=최근 한국 경제는 고전 중이다. 여기에 ‘1만달러 시대의 한국병(病)’의 한 특징인 집단이기주의와 정책 혼선이 경제 회생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한국 경제가 어느 정도 버티고 있는 것은 수출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

하지만 ‘수출 버팀목’도 따져보면 몇 개 안된다. 올 상반기 수출 순위 1∼4위인 △자동차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컴퓨터 등 4개 품목의 수출액은 337억2000만달러. 전체 수출액(893억1000만달러)의 37.8%에 이른다.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주력 기간산업도 아직은 호조다. 하지만 세계적 공급과잉에 중국이 한국을 바짝 쫓아오고 있어 안심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기술이 빠르게 변하는 첨단산업은 중국과의 기술격차가 길어야 1∼2년,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전통산업은 5년 안팎으로 내다본다. 섬유 등 노동집약산업의 경쟁력은 이미 추월당했다.

서울대 정영록(鄭永祿·중국경제학) 국제지역원 교수는 “올해 80억달러에 육박할 중국에 대한 무역흑자가 3∼5년 뒤에는 제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뒤에 중국이 있다면 앞에는 기술력과 자본을 앞세운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의 벽이 있다. 무역연구소 김극수(金克壽) 동향분석팀장은 “일본이 최근 사정이 좋지 않아 우리가 다소 방심하지만 아직은 한국이 중국보다 앞선 것보다는 일본이 한국보다 더 많이 앞서 있다”고 진단했다.

▽구호에 그칠 수도 있는 ‘성장산업’ 육성=올 4월 LG생명과학이 자체 개발한 항균제 팩티브가 국내 처음으로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신약(新藥) 승인을 받았다. 연간 최고 800여억원의 수입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는 쾌거다.

하지만 이런 성공이 가능하기까지 들어간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12년간 3000억원의 연구비와 100여명에 이르는 각 분야 연구원이 ‘가능성 0.01%’에 매달려 노력한 결과다.

산업자원부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 등은 경쟁적으로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 환경기술(ET) 나노기술(NT) 등 이른바 ‘T자 산업’을 차세대 성장엔진으로 꼽는다.

‘성장산업’ 육성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부처간 ‘밥그릇 챙기기’까지 겹치면서 자칫하면 국가예산 낭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 산업계는 물론 정부 안에서도 나온다. 산자부 고위 당국자는 “지금 한국의 수준에서 NT BT 등은 신기루로 그칠 수 있는데 지나친 환상을 갖고 에너지를 쏟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고 말했다.

▽기업의 사기를 북돋워야 한다=한국을 먹여 살릴 미래 성장동력을 키우는 주역은 인재와 자본, 시장 정보가 몰려 있는 기업이다.

정부가 해야 할 큰 역할은 기초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과 함께 기업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최소한 기업의 투자의욕을 꺾지는 말아야 한다고 경제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반도체(삼성전자 기흥공장 증설) 자동차(현대-다임러 상용차 전주공장 투자 유치) LCD(LG필립스 파주공장 건설) 등은 정부의 규제나 노사관계에 발이 묶여 많게는 수십조원의 투자가 늦어지고 있는 사례다. 더구나 이들은 한국을 먹여 살리는 ‘효자 품목’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李彦五) 상무는 “미래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치고 나갈 수 있는 대기업을 적대시하지 말고 투자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과감한 규제 철폐와 기업정신을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기술파급 효과 큰 새 첨단산업 발굴을”▼

세계 3대 곡창지대인 팜파스 대평원을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는 1930년대엔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부국(富國)이었다. ‘남미의 진주’로 불리던 아르헨티나는 74년 1인당 국민소득 1만175달러까지 갔지만 이후 30년간 한 번도 1만달러를 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주저앉은 원인 가운데 하나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 점이 꼽힌다. 전통적으로 경쟁력이 있던 농축산업을 대체할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목재 펄프가 전통 산업이던 핀란드는 90년대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3%의 예산을 정보기술(IT) 관련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자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95년 18위이던 핀란드는 지난해 2위로 뛰어올랐다.

한국무역협회는 최근 ‘주요국의 고소득 달성 이후 위기와 대응’ 보고서에서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기존 전통산업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주도 산업을 발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경제 역시 마찬가지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최근 20년간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주력 산업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 동력의 발굴이 시급한 시점이다. 전문가들은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기술 파급 효과가 큰 새로운 산업을 선택해 집중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함께 제조업 위주로 수출 비중을 더욱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LG경제연구원은 ‘2만달러 시대 언제 도달하나’ 보고서에서 “주요 선진국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내수에 비해 수출 비중이 훨씬 높았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의 GDP 대비 수출 비중은 35%에 그치고 있다. 일찌감치 2만달러를 달성한 홍콩과 싱가포르는 GDP 대비 수출 비중이 100%를 훨씬 넘는다. 개방 경제를 표방하며 선진국에 진입한 아일랜드 역시 80년 38.8%이던 수출 비중이 지난해 71.8%까지 높아졌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최근 ‘글로벌 톱10 기업 키우기’ 보고서에서 “서비스업만으로 1인당 소득 2만달러를 이루는 데 필요한 수출 증가를 기대할 수 없다”며 “제조업에 더욱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일부에서 ‘한국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서비스 산업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

서비스업 가운데 운송통신업 부문만 수출 비중이 43%를 차지하고 있지만 금융 등 다른 서비스 부문은 수출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BCG는 “서비스업 발전이 제조업 발전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진단▼

다시 고전(古典)을 펼쳐보자.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인 조지프 슘페터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기업 혁신을 주장했다. 기업이, 정확히는 경영자가 생산요소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행위가 혁신이다. 새 성장동력을 찾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뜻한다.

반박의 여지가 있겠지만 지금까지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것은 바로 기업 혁신이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기업가 정신을 돋우는 사회 전체의 합의가 있었다.

최근 한국이 ‘1만달러 늪’에 빠졌다는 우려가 일고 있다. 여러 대안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들이 스스로 혁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한국은 훌륭한 성장 기반도 마련돼 있다. 잘 갖춰진 정보기술(IT) 인프라와 풍부한 수출 경험, 전후방 연관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배치된 산업구조가 그것이다.

문제는 성장엔진을 추진하는 동력, 즉 기업들의 투자의욕이 부족한 것이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창조적 기술 개발이 가능하도록 관련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 또 기술 혁신이 산업화로 이어지도록 금융 세제 관련 지원책도 내놓아야 한다. ‘특혜시비’를 염려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기업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장기 연구개발(R&D) 투자도 정부 몫이다.

정부가 지원한 기업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 이를 과감하게 용납해 주는 풍토도 조성해야 한다. 정부가 성과주의에 휘둘려 근시안적 정책에 사로잡힌다면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기업들도 임금 탓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고비용 구조를 인정하고 고효율로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박중구 산업연구원 산업동향분석실장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김광현 이은우 홍석민 천광암

정미경 신치영 이헌진 고기정기자(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