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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의 테마 여행]방랑자 카사노바의 삶을 따라…

입력 | 2003-07-10 16:58:00

산 마르코 광장 맞은편 운하 위에 연극무대와 같은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산 조르조 마조레의 전경. 1559년 공사를 시작해 158년만에 완공된 교회와 수도원으로 이탈리아 건축가 팔라디오의 작품이다. 사진제공 월드콤


“나는 여자들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러나 자유를 더 사랑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1725-1798)가 7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곳은 체코 프라하의 둑스 성(城)이었다.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후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렸던 기이한 인물 카사노바. 그는 많은 여성의 체취를 탐닉한 감각파였고 낭만파였지만 그가 추구했던 지향점은 여성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관통한 이데아는 언제나 ‘자유’였다.

종횡무진 유럽을 돌아본 그의 여행기는 사실적인 묘사와 풍자를 통해 후세인들에게 그 시대의 유럽을 찬찬히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코드가 되고 있다. 호색가가 아닌 위대한 기록자로서의 그를 벗 삼아 낭만적인 유럽 여행을 떠나 보자.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방랑자

카사노바는 18세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40여권의 저서를 남긴 명석하고 박식한 사람이었다. 신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방면에 걸친 재능은 언제나 카사노바의 방랑벽을 부추겼다.

한 여성의 남자가 되기를 거부했던 것처럼 그는 어디에도 붙박이지 않은 채 늘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 당대의 군주들을 만나 자신의 재능을 과시했고 계몽사상가 볼테르와 만난 자리에서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도 했다. 넘치는 재능과 해박한 지식은 신분 상승을 위해 상류사회를 기웃거릴 때도 활용됐지만 여성들을 탐할 때도 동원됐다.

그는 낯선 곳에 가도 이방인이 아니었다. 카사노바 연구가인 에블린 하메그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기처럼 자유롭고 모든 민족적 편견에서 벗어나 터키의 석학이나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선주(船主) 등 누구와도 공개적인 토론을 벌였다. 그가 속한 드넓은 나라에는 국경이 없었다.”

그의 자서전은 무려 122명의 여인과 벌인 흥미로운 연애담과 18세기의 풍습, 생활을 상세히 묘사해 귀중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카사노바식 유럽 여행의 출발점은 이탈리아 베네치아다. 이어 파리 스페인 프라하로 동선이 이어진다. 이중에서도 카사노바를 만들어낸 도시 베네치아와 그를 완성시킨 도시 마드리드를 빼놓을 수 없다.

스페인의 필리페 3세가 완성한 건물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마요르 광장. 마드리드의 관광 명소로 국왕의 취임식과 투우 경기 등이 열렸던 곳이다. 지금은 산책로로 사랑받고 있다.사진제공=월드콤

●여행의 시작, 베네치아

정기적으로 홍수의 피해를 보면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 교통수단으로 곤돌라를 이용하는 불편을 감내한 채 이를 세계적인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낸 베네치아인들을 보면 카사노바를 떠올리게 된다. 출생 신분에 대한 열등감을 재능으로 극복하고 유럽 최고의 명사라는 명예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는 베네치아에서 희극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그의 작품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에서 아버지가 극장 소유주였던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라고 거짓 주장을 했지만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6남매를 남기고 서른 여섯의 나이에 죽은 평범한 배우였다.

지금도 베네치아의 산 사무엘 성당 뒤뜰로 돌아가면 카사노바의 문패가 새겨진 회색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카사노바는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 파도바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하는 지적인 자본도 파도바 대학의 법학박사 학위 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성직자였다. 그래서 카사노바를 단순한 호색한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베네치아 여행이 뜻밖의 경험일 수 있다.

이탈리아 북동부 맨 가장자리에 있는 베네치아는 오래 전부터 동양으로 가는 관문이었고 십자군 전쟁에서 승리한 후로는 부와 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쥔 명예로운 도시였다. 그런 흔적들은 산마르코 성당의 화려함으로 남아 있다.

베네치아 관광은 산마르코 광장에서 시작된다. 광장은 산마르코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을 품은 핵심 관광 명소이다. 광장의 정면을 장식하는 산마르코 대성당은 동서양 건축기술과 장식예술이 조화를 이룬 전당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들인 유명한 청동 마상들의 복제품과 부조, 채색된 대리석이 돋보인다.

출입구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각으로 장식돼 있다. 둥근 돔은 동양적인 이미지를, 실내는 이탈리아의 자유분방하고 귀족적인 느낌을 주어 누구든 이곳에 발을 들이면 감탄으로 한번쯤 숨을 고르게 된다.

대성당과 함께 꼭 들러야할 명소는 두칼레 궁전. 이 궁전은 고딕 건축 양식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이곳에서 카사노바 투어를 경험해볼 수 있다. 카사노바가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그의 나이 서른 살 때 이곳에서 수감이 결정됐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이제 나도 자유를 찾아 떠나며 당신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겠소.’

탈옥자 카사노바가 남긴 해학적인 메모다. 카사노바가 수감됐던 피옴비 감옥과 두칼레 궁전을 연결한 ‘탄식의 다리’는 그 아름다운 부조 때문에라도 꼭 들러볼만한 명소다.

베네치아엔 카사노바와 관련된 독특한 명소들이 많다. 베네치아의 특산품인 유리 제품으로 유명한 무라노섬과 18세기 스타일의 카페 플로리안이 그곳이다.

무라노섬은 카사노바가 수녀인 여인과 정열적인 사랑을 나눴던 가면 카지노가 있는 곳이다. 또 카사노바가 친구를 만나 도박을 즐기고 여인들과의 밀회를 위해 자주 드나들었던 카페 플로리안에서는 카사노바가 즐겨 마셨다는 최음제 스타일의 초콜릿과 카사노바 향수를 판매하고 있다.

●카사노바보다 정열적인 도시

‘계몽기 유럽의 난행(亂行)에 대한 완벽한 기록’이라고 평가받는 카사노바의 회고록 ‘내 인생의 이야기’ 10권과 11권에는 스페인 여행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베네치아에서 탈옥해 파리로 갔던 카사노바는 이곳에서 루이 15세에게 복권 제도의 도입을 건의해 그 책임자로서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뛰어난 사업 감각에도 불구하고 인력 관리에서 허점을 드러내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도망치듯 스페인을 방문한다. 스페인에서 그가 머물렀던 도시들은 수도인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였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기행문에는 여인들이 등장하고 당시의 도시 모습과 생활상이 생생히 기록돼있어 읽고 있으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카사노바가 스페인에서 처음 방문한 마드리드는 안달루시아에서 갈리시아까지 다양한 도시의 방언과 문화,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이베리아 반도 최대의 메트로폴리스다. 해발 646m의 카스티야 평원 중앙에 있으며,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분위기가 현대적이다. 중요한 비즈니스 센터와 행정부 국회 스페인 왕가의 저택 등이 이곳에 모여 있다.

시내관광의 기점은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이며 10개의 도로가 이곳에서부터 방사상으로 뻗어나간다. 대부분의 볼거리들이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밀집돼 있다.

카사노바는 추운 마드리드의 겨울을 ‘푸에르타 델 솔’을 서성이며 보내곤 했다. 책에는 ‘문은 없지만 햇볕을 쬐기 위해 산책하러 오는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기록했다.

꼭 가 봐야할 곳으로는 프라도 미술관을 꼽을 수 있다. 18세기에 후아 데 비야누에바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한 이 미술관에는 벨라스케스, 고야, 엘 그레코, 보티첼리, 렘브란트 등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이 미술관에는 소장된 회화작품만 8000점이 넘어 그림을 여유 있게 감상하려면 꼬박 며칠이 걸린다.

20세기 현대 미술작품을 주로 소장한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도 빼놓을 수 없는 곳.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시돼 있으며, 달리와 미로, 타피에스 등의 작품들도 소장돼 있다.

카사노바는 스페인에 종교재판소만 없었다면 예술과 문화가 더 화려하게 꽃피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이들 미술관에 들르면 그런 종교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라틴의 정념을 예술로 승화시킨 스페인의 매력에 심취하게 된다.

●마지막 여행지 체코의 둑스성

카사노바가 말년을 보낸 체코 페플리체의 둑스성 외관. ‘감각의 순례자 카사노바’의 저자인 김준목씨가 사진을 제공했다.

체코는 카사노바의 마지막 여행지였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유럽 전역을 떠돌던 그는 보헤미아의 둑스 성에서 요제프 칼 이마누엘 폰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많은 글을 썼는데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도 1790년 초부터 쓰기 시작해 1792년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1798년 6월 4일 둑스에서 눈을 감았다.

‘나는 철학자로서 살았고 기독교도로서 죽는다’는 말을 남겼던 카사노바. 지금도 프라하에 가면 그의 흔적들을 더듬을 수 있다.

먼저 모차르트 박물관이다. 카사노바는 이곳에서 모차르트를 만나 그가 오페라 ‘돈 조반니’를 개사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악보 필사본들이 소장돼 있고 모차르트와 함께했던 역사적인 인물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이 박물관에선 카사노바의 초상화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카사노바의 밀랍인형이 그대로 보존된 둑스 성은 프라하 시내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성 근처의 거리와 호텔 등에 모두 ‘카사노바’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

바로크 풍의 그림과 조각들로 꾸며진 이 성은 그야말로 카사노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카사노바가 실제로 생활했던 방과 그의 편지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그의 시신은 둑스 성 근처 세인트 바바라 교회 포도밭에 안치됐지만 훗날 성을 재정비할 때 없어졌다. 지금은 사진으로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카사노바를 만나기 위해 이 성을 방문하고 기념품점에서 카사노바의 포스터를 산다. 사서로 들어와 하인들의 멸시를 받으며 묵묵히 기록에 전념했던 카사노바는 이렇게 수 백년을 지나 거꾸로 성의 주인이 되어 손님을 맞고 있는 것이다.

둑스 성을 떠날 때면 그가 남긴 어록 한 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소위 우리 운명의 작가다.’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여행정보▼

○ 관광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은 월∼토요일 오전 9시45분∼오후 5시 반 개관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오후 2∼5시. 두칼레 궁전은 계절에 따라 개관 시간이 다르다. 겨울에는 오전 9시∼오후 4시, 휴관은 성탄절과 1월1일, 노동절뿐이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은 매일 오전 9시∼오후 7시 개관하고 공휴일과 일요일은 오후 2시까지 연다.월요일은 휴관(www.museoprado.mcu.es). 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는 오전 10시∼오후 7시, 일요일은 오후 2시 반까지 개관한다. 화요일 휴관.베네치아와 마드리드를 포함한 ‘카사노바 루트’ 유럽여행 상품은 7일이 소요되는 남유럽 여행코스이며 경비는 약 245만원. 문의 굿모닝트래블

(02-757-6666 /www.igoodmorning.co.kr)

○ 기타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카사노바 연구자들은 약 200명. 그들에 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다

(www.dickinson.edu/∼emery/Casanova.htm 또는

www.giacomo-casanova.de 등).또 카사노바와 관련된 사진자료와 기록서들에 관한 내용은 김준목 저 ‘감각의

순례자 카사노바(시공사)’편을 참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 관한 일반 정보는 이탈리아 관광청(02-739-0034 /www.enit.or.kr), 스페인에 관한 일반 정보는

스페인 관광청(02-732-8877 / www.okspain.org)과

주한 스페인 대사관(02-794-3581)에서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