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바이러스’의 창궐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생존자들의 처절한 공포를 담아낸 영화 ‘28일후’. 사진제공 20세기폭스코리아
꽤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병원 침대에 홀로 누워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리 불러봐도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밖을 나선다. 바람이 황량한 거리를 훑고 지나가자 쓰레기 더미가 뒹굴며 자기 존재를 알린다. 유일하게 내게 반응하는 것은 자동차의 보안 경보 장치뿐.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후’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영국 런던의 음산한 풍경으로 서두를 여는 묘한 공포영화다. 이 영화는 공포 뿐만아니라 종말을 맞은 사회와 그속에서 피어나는 한가닥 희망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벼운 납량물이라기보다 혼돈의 시대에 ‘인간다움’을 추궁하는 경고장으로 보인다.
감독의 메시지는 감염자들을 서로 죽이게 하는 ‘분노 바이러스’라는 독특한 소재에서 드러난다. 영국 케임브리지 연구소의 영장류 실험실. 이곳에서는 영장류에게 폭력 비디오를 24시간 틀어준다. 이를 본 영장류는 ‘분노 바이러스’를 발생시켜 사람을 감염시키고 단 28일만에 영국인들이 거의 다 죽는다.
그러나 교통 사고로 병원에서 혼수 상태에 있던 짐(실리언 머피)이 실날같은 희망. 그는 아직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인간들을 찾아나선다.
‘분노’라는 감정이 ‘바이러스’라는 실체로 확산된다는 발상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바이러스의 발생과 전염 경로에 있지 않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도 인간은 서로 죽여왔어. 그러니까 지금 상황도 정상인거야”라는 대사처럼, 유 무형의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분노는 어떤 바이러스보다 더 쉽게 확산되고 전염된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영화에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인간이다. 짐은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셀레나(나오미 해리스) 프랭크(브랜든 글리슨) 해나(미건 번스)를 만난 뒤 보호받기 위해 무장 군인을 찾아간다. 그러나 감염되지 않은 군인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폭력은 더 끔찍하다. 결국 인간이 싸워야 하는 대상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희망이기도 하다. 군인을 찾아 떠나는 짐 일행의 여행은 더할나위없이 평온해 분노 바이러스 감염자들의 기괴한 모습과 대비된다. 이들은 풀밭에서 점심을 나눠 먹고 차 안에서는 카드 놀이를 한다. 다만 프랭크가 평원을 달리는 한 무리의 말을 보며 가족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장면은 ‘메시지 과잉’으로 낯간지럽기도 하다.
‘쉘로우 그레이브’ ‘트레인 스포팅’으로 호평받은 대니 보일 감독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영화에 사회적 메시지를 녹여내는 데 재능을 발휘했다. 쉽게 보고 쉽게 잊을 오락물로 여기고 극장을 찾은 관객은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듯. 17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