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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달러서 주저앉나]전문가 좌담

입력 | 2003-07-10 18:21:00


《본보는 1일자부터 연재해온 ‘1만달러서 주저앉나’ 시리즈의 마지막 회(10회)로 전문가 좌담을 마련했다. 9일 동아일보사 회의실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은 한국 사회가 이익집단의 욕구 분출과 정부의 미흡한 대응으로 ‘1만달러 함정’에 빠져 있다고 입을 모았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회복으로 많은 국민이 선진국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내 몫 찾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

참석자들은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각 이해(利害)집단이 공동체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정부가 법과 원칙을 세워 경제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무작정 선진국을 따라가기보다 한국의 실정에 맞는 발전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좌담에는 이시형(李時炯)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송병락(宋丙洛)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심상달(沈相達)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이 참석했다. 사회는 고승철(高承徹) 동아일보 경제부장이 맡았다.》

▼연재물 목록▼

- 성장동력이 무너진다
- 지도층 도덕해이
- 인재가 떠나간다
- 투자 개방 엇박자
- 정치는 5000달러 수준
- 하향 평준화의 덫
- '2030'세대 과소비 거품
- 노조 강경투쟁의 그늘
- '내몫 챙기기' 집단신드롬

▽사회=한국은 19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돌파하고 8년을 허송한 끝에 1만달러를 다시 회복했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심상달 선임연구위원=관치(官治)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외부 환경도 안 좋았다. 아시아가 전체적으로 위기를 맞았다. 정부는 원화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리하게 달러를 쏟아 부어 결국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 그래도 한국은 운이 좋았다.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 문제와 해법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덕분에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

▽송병락 교수=62년부터 95년까지 30여년 사이에 한국의 수출액은 1억달러에서 1000억달러로,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에서 1만달러로 늘었다. 한국은 어느 나라도 보여주지 못한 저력을 발휘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90년대 중반 고(故) 최종현(崔鍾賢) SK회장은 “한국의 제조업 인건비가 영국보다 40%나 높다”며 책상을 쳤다. 일본의 금리가 5%일 때 한국은 15%였다. 정치적인 이유에 따른 기업 목조르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시형 소장=1만달러를 다시 회복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외환위기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남미(南美)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적처럼 위기를 극복했다. 한국인은 모든 것을 절망적으로 보는 바닥심리에 잘 빠진다. 하지만 바닥에서 빠져나오는 폭발적인 힘도 갖고 있다.

▽사회=많은 선진국이 1만달러를 넘어선 뒤 경제위기를 경험했다. ‘1만달러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한국의 1만달러 증후군은 무엇인가.

▽이 소장=일본의 경제 회복이 더딘 이유는 ‘거지 망상(妄想)’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미래가 불안하면 돈을 안 쓴다. 일본 예금 잔고의 절반을 65세 이상 고령층이 갖고 있는데 이들이 지갑을 닫고 있다. 반면 한국인은 경제사정이 조금만 좋아져도 허리띠를 푼다. 국내 시장에 활력을 주기 위해 소비 증가는 필요하다. 문제는 소비를 늘리기 위해 전체 파이를 키우기보다는 기존의 파이를 뜯어먹으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 점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요즘 외국을 다녀보면 여기저기 한국기업의 공장이 너무 많아서 놀란다.

▽송 교수=과거 시골에서는 “아들이 고시에 합격하면 아버지가 일찍 죽는다”는 말이 있었다. 자랑하느라 술독에 빠져 건강을 잃는다는 뜻이다. 한국은 짧은 기간에 급성장하다 보니 국민의식이 경제 수준을 못 따라간 느낌이다. 나라 전체가 혼돈에 빠져 있다. 상식적으로 노동자라고 하면 ‘집도 절도 없이’ 노동을 팔아 어렵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현실은 어떤가.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갖고 있고 해외도 마음대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자처한다. 심지어 대학교수마저 노동자라고 한다.

▽이 소장=한국인에게는 ‘무당기(氣)’가 있다. 신이 붙으면 누구도 못 말린다. 감성을 관장하는 우뇌(右腦)를 논리를 담당하는 좌뇌(左腦)가 제어하지 못한다. 신용카드 문제를 보면 ‘갚을 수 있나’를 생각하는 좌뇌가 ‘일단 쓰고 보자’는 우뇌를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심 위원=일부 계층의 카드 빚은 중요한 사회 문제지만 경제 전체적으로는 소비위축이 더 심각한 문제다. 소비자들이 우리 경제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아 돈을 쓰지 않는다. 불안한 노사관계 등으로 경제 전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사회=한국의 노사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심 위원=‘떼 쓰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으로 예상되면 기업들은 투자를 안 한다. 떼를 써서 분배문제를 해결하면 시스템이 망가진다. 서로 충돌하는 이해(利害)관계를 조정하려면 법과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한다. 불투명한 기업 경영과 노조의 집단이기주의에 대해 모두 법과 원칙의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새 정부 출범 후 실수가 많았다. 아직 의구심이 남아 있지만 최근 정부의 변화에 기대를 걸어볼 만한 것 같다. SK글로벌 문제나 철도파업 사례를 보면 정부의 처리방식에 진전이 있다.

▽송 교수=한국에서는 매년 60여만명의 신규 노동인력이 쏟아지고 있다. 기존 노조는 자기들에게 파이가 더 돌아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는 새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인력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업난만 가중시킨다. 너도나도 임금을 올리면 물가가 오르기 때문에 결국에는 남는 것이 없다.

▽이 소장=한국인이 내 몫 챙기기에 열심인 가장 큰 이유는 자녀교육 때문이다.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 어떻게든 더 많은 임금을 받아내려 한다. 그러나 기업들이 이를 참지 못하고 해외로 나가버리면 공들여 키운 자식을 어디에 취직시킬 것인가.

▽사회=최근 1인당 국민소득을 2만달러로 끌어올리자는 논의가 많다.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심 위원=2011년경 한국이 2만달러를 돌파해도 영국은 4만5000달러, 호주는 3만7000달러, 일본은 4만5000달러에 이른다. 2만달러를 넘어서도 경제 강국의 반열에는 들어갈 수 없다. 선진국과의 격차를 줄이고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는 것이 2만달러의 의미다. 다수가 공감하는 이정표가 있으면 문제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수치(數値)보다는 이정표로서 의미가 있다.

▽송 교수=국가 정책이 잘못 나가니까 최소한 ‘2만달러’라도 내세워 방향을 틀어보자는 것이다. 1960년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필리핀의 30% 수준이었다. 그때는 모두 필리핀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했다. 지금은 한국이 필리핀보다 10배 이상 많다.

▽이 소장=한국인은 목표를 정하면 과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95년에도 1만달러를 넘었지만 환율을 억지로 묶어두는 등 무리한 수단을 썼다가 파국을 맞았다. 2만달러라는 수치에 너무 집착해 과거와 같은 부작용을 겪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회=한국이 국민소득을 늘리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

▽송 교수=우선 튼튼한 국가비전이 있어야 하고 국민이 이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것은 전부 버리고 외국 것만 따르는 것이 세계화가 아니다. 미국의 한 권위 있는 경제잡지는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기업으로 꼽았다. 우리 안에 세계 일류가 있는데 왜 남의 모델을 따라야 하는가. 네덜란드에서 배울 것이 아니라 삼성전자에서 배워야 한다. 요즘 대기업 정책은 ‘투명성’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다. 투명성은 기업이 지켜야 할 기본일 뿐이지 목표는 될 수 없다. 기업과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소장=우수한 인재를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고급 산업을 육성하지 않으면 한국은 5년 안에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을 것이다. 나는 동아일보의 ‘1만달러서 주저앉나’ 시리즈를 읽고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기사를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국민의 70%가 읽는 신문을 대통령은 안 보겠다고 하니 불안하다. 현 정부의 인적 구성에는 문제가 있다. 비판만 할 줄 알고 현실적인 대안은 없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특히 대통령도 주인의식이 없다. 청와대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대통령이 스스로 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송 교수=경영학에서 ‘나는 잘났고 도덕적이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X이론’이라고 한다. 현 정부에는 X이론의 신봉자가 많아 보인다. 나는 잘났는데 특정 언론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심 위원=회사와 노조가 합의해서 임금을 올리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불법 행위가 발생할 때 법을 집행하면 된다. 현 정부가 사회적 약자 보호를 내세워 정권을 창출한 것은 사실이다. 온정적인 정책이 나올 수 있지만 어떤 경우든 법과 절차는 따라야 한다. 현재 정부의 이해관계 조정시스템에는 문제가 있다. 필요하면 정부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

▽이 소장=한국인은 낙천적이다. 절벽이 앞에 있어도 그냥 달린다. 동아일보의 이번 시리즈가 한국이 절벽 앞에서 멈출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1만달러서 주저앉나' 시리즈 게재 순서▼

‘내몫 챙기기’ 집단 신드롬(7월1일자 A1·3면)

노조 강경투쟁의 그늘(7월2일자 A3면)

‘2030’세대 과소비 거품(7월3일자 A3면)

하향 평준화의 덫(7월4일자 A3면)

정치는 5000달러 수준(7월5일자 A3면)

투자·개방 엇박자(7월7일자 A5면)

인재가 떠나간다(7월8일자 A5면)

지도층 도덕적 해이(7월9일자 A5면)

성장동력이 무너진다(7월10일자 A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