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시도했던 마거릿 대처 총리가 물러난 뒤 1990년대 초 영국에서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모색하기 위한 논쟁이 벌어졌다. 런던 시내에서 고유가에 항의하는 트럭운전사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참여자본주의/개빈 켈리 외 지음 장현준 옮김/416쪽 1만8000원 미래M&B
“미국의 기업은 10분 안에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독일의 기업은 10년 안에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을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이 말은 상당히 과장된 것이겠지만 두 경제의 차이를 잘 표현해 준다.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 환경상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통상 미국의 자본주의를 ‘주주 중심 자본주의’라고 하고 독일 경제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또는 이 책에서 채용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참여자본주의’라고 한다.
미국의 기업 경영자들이 단기 이익에 골몰하게 되는 이유는 특별히 한 기업에 헌신할 생각이 없이 오로지 소유한 기업 지분에 대해 발생하는 당장의 이익(배당금 및 주가상승에 따른 차익)에만 관심을 갖는 주주들이 기업에 대해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에는 주주 외에도 채권자, 종업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있지만 미국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주주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독일을 비롯한 유럽 대륙의 몇몇 나라에서는 여러 이해 당사자들이 서로 장기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업의 안정적 번영을 위해 협조하고 그 성과를 서로 나누는 체제를 채택해 왔다. 말하자면 기업이라는 조직에 관여하는 다양한 ‘회원’들의 적극적 참여와 분배권리, 그리고 그에 따른 의무가 함께 가는 체제다. 기업을 예로 들었지만 미국은 시장과 계약을 중시하는 사회인 반면 유럽의 참여주의 사회는 국가와 공동체의 역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유럽의 우파와 좌파는 위의 두 가지 모델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의 중간에 끼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했던 1990년대 초의 영국이라는 특이한 상황의 산물이다.
1980년대 초 마거릿 대처 총리가 집권하기 전까지 영국은 저성장과 고물가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이른바 ‘영국병’에 시달렸고, 대처 총리는 급진적 시장중시 개혁을 단행해서 이를 극복하려 했다. 국유기업의 민영화, 보조금 삭감, 통화 공급의 통제를 통한 인플레 억제, 노조 탄압, 자본 자유화 등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단행했다. 그 결과 과거와 같은 단기적 성장과 침체의 악순환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대신 산업의 붕괴, 고실업을 경험했다. 노동당 등 좌파의 고민은 구좌파의 한계와 동시에 대체의 우파정책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좌파적 대안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개진된 참여자본주의(또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이런 고민에서 나온 성과 가운데 하나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는 한국의 노무현 정부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에 의해 급진적으로 실시된 대처식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출범했다. 급진적 시장개혁이 초래한 문제 가운데 비정규직의 양산, 지역불균형을 포함한 사회경제적 양극화, 단기 업적주의에 따른 투자의 급감 등 우리의 문제는 영국이 1990년대 초반 직면했던 문제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안정적 투자에 근거한 안정적 고용, 참여와 그에 따른 책임 등 헌신을 통한 상생과 번영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이것은 한국의 현 정권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진보적 정치세력이 고민하고 개척해야 할 길이다. 특히 세계화의 진전은 한 나라의 국민을 주요 이해 당사자(참여자)로 설정하고 있는 참여주의 모델에 장애요소이다. 이 책은 이런 고민에 답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하나의 흥미 있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조원희 국민대 교수·경제학 chowh@mail.kookmi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