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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프리즘]장소원/개혁도 '말'을 바로써야

입력 | 2003-07-15 18:28:00


며칠 전 발가락뼈에 금이 가는 작은 사고를 당했다. 서랍장을 들어 옮기다 무게를 못 이겨 떨어뜨리는 바람에 ‘제 발등을 제가 찧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화두는 ‘상처’였다.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곧 ‘아픔’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아픔을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상처를 입게 되면 자신의 상처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도 달리 없지 않나 한다.

▼말에 찔린 상처 쉽게 낫지않아 ▼

버지니아 울프의 일생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은 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이야기는 책의 본문보다도 부록처럼 붙어 있던 남편 레너드 울프의 메모였다. 자신의 아내가 강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하고 난 후 홀로 남은 레너드는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슬프고 슬퍼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지만 그토록 큰 슬픔도 발가락에 난 작은 종기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다른 사람의 어떤 불행도 자신의 아픔에 비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육체에 입은 상처와 마음에 입은 상처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더 큰 아픔일까. 육체의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기 마련이지만 마음에 입은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우리말에도 ‘칼에 맞은 상처보다 말에 맞은 상처가 크다’거나 ‘칼에 찔린 상처는 쉽게 나아도 말에 찔린 상처는 낫기 어렵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말’이라는 무기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너무 쉽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같다. 언론의 지나친 선정적 보도가 그러하고, 정치인들의 의혹 부풀려 터뜨리기와 같은 행태가 그러하며, 몇 시간 뒤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말씀이 그러하다.

언론에서는 어떤 사건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고 생각되면 심층적인 조사와 탐문을 벌이기에 앞서 ‘이런 일이 있다는데?’와 같은 식의 제목을 붙여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 진실을 채 밝히지 못한 소문이 의문문의 제목으로 일단 방송을 타고 나면, 그것이 진실처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사물을 정당화시키는 미디어의 힘 때문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잘못된 보도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100건의 특종을 가리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언론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에 도움이 될 만하다고 판단되면 일단 창처럼 날카로운 말로 상대를 찔러 보는 습관을 가진 정치인은 또 얼마나 되는지. 요행히 정곡을 찔렀다면 그것은 한 건을 올린 셈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상대방측에서 명예훼손이니 손해배상이니 하며 거센 반응을 보이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책임하게 발을 빼는 경우는 얼마나 더 많은가. 이 경우에도 일단 못 먹는 감을 찔러 보기는 한 셈이니 상대방 흠집 내기에는 성공했다고 보는 걸까. 이런 정치판에서 우리는 생생한 언어폭력의 현장을 목격한다.

개성이 강하기로는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을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들은 그의 돌출발언을 해명하고 바로잡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후약방문을 내야 할까. 그의 말 한마디로 엄청난 국익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또 얼마나 가슴을 졸여야 하는 걸까.

▼언어폭력의 현장 날마다 목격 ▼

대통령은 물론이려니와 현대 사회의 언론과 정치인은 누가 뭐라 해도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누리는 권력은 그들을 믿고 지지해 주는 국민이 있어야만 생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스스로의 말이 한 개인이나 국민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지는 않는지 늘 되돌아보아야 한다. 언론과 정치의 개혁은 올바른 국어사용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며칠 동안 상처 받은 발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인지 무척 소중한 사람의 생일을 챙기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역시 내 몸의 상처가 중요하기는 한 모양이다.

장소원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