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환위기 사태 직후 국제통화기금(IMF)의 요청으로 진행된 은행구조조정은 본래 취지와 달리 줄곧 정치바람에 흔들렸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98년 6월 27일 5개 지방은행 퇴출이 최종 결정된 뒤 기자들에게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차라리 내 심장에 칼을 꽂으시오.”
외환위기의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구조조정 요구로 서슬이 퍼렇던 98년 6월 초.
퇴출 검토 대상에 오른 6개 지방은행에 충북은행이 포함된 사실을 알게 된 자민련 구천서(具天書·현 대한태권도협회장) 의원은 상기된 얼굴로 이헌재(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의 집무실을 찾았다. 지역구가 충북 청주인 그로서는 ‘정치적 사활’이 걸린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충북지역 소규모 금융기관이 다 쓰러진 마당에 충북은행까지 퇴출되면 우리 지역은 완전히 망합니다.”
거듭되는 구 의원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이 위원장은 분명한 답을 주지 않았다.
바로 직전 이 위원장은 같은 자민련 소속 김용환(金龍煥·현 한나라당 의원) 의원에게서 30여분에 걸쳐 강력한 항의전화를 받았다. 충남 서천-보령이 지역구인 그의 항의 취지는 ‘왜 하필이면 충청은행을 퇴출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수만명의 은행원이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된 지방은행 전격 퇴출은 이처럼 이 위원장을 선봉장으로 한 DJ정부 쪽과 지역 이해를 지키려는 자민련의 갈등이 표면화된 시발점이 됐다.
퇴출 검토 대상 지방은행에 공교롭게 충청 충북 두 은행이 함께 포함되자 자민련 내에서는 심지어 “DJ와의 공동 정권 창출은 처음부터 ‘사기극’이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금감위의 은행퇴출 준비는 이미 4월 초부터 극비리에 시작됐다.
1차로 걸러진 시중은행과 지방은행을 포함한 12개 대상 은행 가운데 평화은행과 6개 지방은행이 퇴출 검토 대상으로 압축됐고 이를 근거로 은행구조조정 방안을 담은 보고서(일명 홍길동Ⅰ)가 작성됐다. 금감위는 분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회계법인 변호사 대학교수 등으로 은행경영평가위원회(이하 경평위)를 구성한 뒤 곧바로 ‘살생부 작성’ 작업에 들어갔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면서 퇴출 대상으로 거론된 은행에서는 하루에 수천억원씩 예금이 빠져나갔다. 특히 퇴출 은행에 충북 충청은행이 포함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자민련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웠다.
여기에다 충북은행과 충청은행을 최종 퇴출 대상에서 빼내기 위한 물밑로비가 치열해지면서 충북지역 의원과 충남지역 의원들간에도 의견이 엇갈려 자민련은 내부균열 조짐마저 보였다.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는 충북은행을 대변하는 구 의원과 충청은행을 대변하는 이인구(李麟求) 의원간에 서로 “우리 지역 은행이 우선 퇴출 대상에서 빠져야 한다”며 설전을 벌이다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욕설을 퍼붓는 장면까지 연출됐다.
이때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김 의원과 이 위원장의 특수관계였다. 김용환이 70년대 재무부장관이었을 때 이헌재는 금융정책과장으로 김용환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차관급 과장’으로 불리던 이헌재는 국장이나 실장 차관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김용환에게 보고할 정도였다.
김용환이 97년 말 IMF 관리체제 이후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을 때 이헌재는 실무대책단장을 맡으며 손발을 맞췄고, 이헌재를 금감위원장에 발탁한 것도 김용환이었다. 자민련 내부에서는 ‘설마 이 위원장이 김 의원을 배신하겠느냐’는 낙관론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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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금융구조조정 업무를 담당했던 A씨의 증언.
“이 위원장은 김 의원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다. 자신을 키워준 김 의원 지역구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상황이 됐는데 속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실제 이 즈음 이 위원장은 사석에서 “지방은행을 퇴출시키지 않으면 안 되느냐”며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 위원장은 경평위 중간심사 결과를 DJ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DJ에게서 ‘원칙대로 밀고 나가라’는 질책을 들어야 했다.
여기에다 자민련 의원들을 더 맥 빠지게 만든 것은 ‘흐름을 절대 거스르지 않는’ JP의 무심한 태도였다.
이 전 의원의 증언. “당시 국무총리였던 JP에게 ‘청와대에서 (퇴출 은행을) 결정하면 다 끝이다. 그전에 DJ에게 잘 얘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JP는 ‘내가 그런 것까지 얘기해야 하느냐’며 거북해했다. 퇴출 은행이 결정되는 날 JP는 대통령한테 가지 않고 골프를 치러 가 허탈함을 느꼈다.”
결국 충북은행은 살아났으나 자민련 의원들의 맹렬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충청은행은 퇴출 대상으로 확정됐다.
은행구조조정 과정에서 또 하나의 돌출변수는 평화은행이었다. 당시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노동계와의 화해에 힘을 기울였던 DJ정부는 ‘근로자 은행’인 평화은행이 퇴출될 경우 노사정위원회 구성 자체가 어려울지 모른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으나 경평위의 최종심사 결과는 ‘평화은행 퇴출’이었다.
금감위는 궁여지책으로 청와대 최종보고에서 평화은행을 제외시켰다.
연원영(延元泳·현 자산관리공사 사장) 당시 금융구조조정 총괄국장의 설명.
“금감위에서는 이미 평화은행이 살아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경평위 결과가 나오기 전에 한국노총 사무국 관계자를 불러 대형은행과의 합병을 권유했다. 그들이 걱정했던 근로자대출은 합병 후 일정 규모를 계속 보장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지만 대답은 ‘노(no)’였다. 97년 말 평화은행의 순자산가치(총자산―총부채)는 마이너스였는데 은행 퇴출 기준으로 삼았던 98년 3월 말 실사 결과는 약간 플러스로 돌아섰다. 이 결과를 보고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순자산가치가 플러스면 법적으로 퇴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 전 위원장은 본보 취재팀에 “당시 평화은행의 미래상환능력을 볼 때 살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노총의 로비가 너무 강한 데다 유상증자를 한다고 해서 살리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평화은행은 99년 대우사태가 터지면서 더 이상 부실을 감당하지 못해 우리은행으로 편입됐다.
아무튼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6월 27일 청와대에서 강봉균(康奉均·현 민주당 의원) 경제수석비서관 주재로 열린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이 위원장은 경기 충청 대동 동남 동화 등 5개 지방은행의 퇴출방침을 최종적으로 보고했다.
‘6월 29일 퇴출 강행’이란 결론에 따라 28일 새벽 퇴출은행을 합병할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 등 5개 인수은행은 퇴출은행의 전산센터와 본점을 접수했다.
관심은 이제 강력한 구조조정과 자본 확충을 전제로 경영정상화 계획에 대해 ‘조건부 승인’ 판정을 받은 조흥 충북 강원은행으로 쏠렸다.
당시 위성복(魏聖復) 조흥은행장은 금감위의 주문대로 신한 장기신용은행 등 우량은행과의 합병을 위해 열심히 뛰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덩치가 너무 크다는 이유였다. 이때 연 국장이 위 행장에게 “합병도 안 되고 외자유치도 안 되는 상황에서 뭔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라”며 충북 강원은행을 합병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 다른 두 은행도 유상증자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합병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98년 10월 23일. 위 행장은 3개 은행 합병안을 들고 이 위원장을 찾았다. 이 위원장은 “지방은행과의 합병은 정부의 구조조정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런데 1주일도 안돼 이 위원장이 위 행장을 다시 불러 “위(청와대)에 보고했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단 조흥은행 본점을 지방으로 옮긴다는 조건을 달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결국 11월 말 조흥은행이 예금보험공사와 작성한 경영정상화각서(MOU)에는 ‘본점 잠정적으로 대전 이전’이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DJ정부는 왜 많은 지역 중에 하필 대전으로 조흥은행 본점을 옮기려고 했을까.
이야기는 다시 자민련과의 갈등으로 넘어간다.
이 전 의원의 증언. “충청은행 퇴출 이후 대전 충남지역에서는 반발이 아주 심했다. 결국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98년 9월 18일 대전을 방문해 ‘조흥은행 본점이 내려오면 전화위복이 되는 것 아니냐’며 충청권 민심을 달랬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흥은행의 본점 이전은 결국 나중에 이근영(李瑾榮) 금감위원장 때 ‘없던 일’로 하기로 결론이 났다. DJP 공조가 이미 끝난 시점에서 더 이상 자민련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냉혹한 정치논리가 작용한 것이다.
98년 한국 금융계를 뒤흔든 은행 퇴출작업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위성복 당시 조흥은행장의 '파워'▼
위성복(魏聖復) 전 조흥은행장은 DJ정부에서 ‘금융계 실세’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K고 출신으로 DJ정부 초기 금융계의 몇 안 되는 호남출신 은행 임원. 특히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이던 박주선(朴柱宣) 현 민주당 의원과는 고교 동문이었다.
1998년 11월 말 조흥은행과 강원은행 충북은행 현대종금의 합병이 강원 충북 지역주민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합병시한을 넘길 것이 확실해지자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고민에 빠졌다.
위 행장을 사퇴시키지 않을 경우 ‘부실책임 경영진 퇴진’이라는 금융구조조정의 기본 원칙이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11월 20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이 위원장은 위 행장에게 사퇴를 요청했다. 그러나 위 행장은 “나머지 임원들을 유임시키는 것은 물론 정부의 조흥은행 처리방침을 분명히 알려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이에 이 위원장이 즉답을 하지 않자 위 행장은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다”고 버텼다.
11월 말 마지막 주에 열린 금감위 전체회의에서 금감위 실무진은 사전 예고없이 위 행장 해임안건을 상정하며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일부 위원들이 “무슨 소리냐. 청와대 사정수석과 상의했느냐”며 강력히 반발했으나 이 위원장은 실무진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통과시켜”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리를 비웠다.
강경기류를 파악한 한 위원이 위 행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단 사표를 내고 나중에 복귀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라고 설득해 결국 위 행장은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위 행장은 4개월 후 화려하게 조흥은행장으로 다시 복귀했다.
재경부 C씨는 “재경부와 금감위에서 위 행장의 복귀를 강력히 반대했지만 무산됐다. 그때 위 행장의 파워를 실감했다”고 털어놓았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자급 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