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국민들은 젊은 시절부터 단계적으로 노후 설계를 한다. 크리스티앙 민들러 부부가 스위스 베른의 집 정원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본보 취재팀은 최근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8개국을 방문해 현지인들의 은퇴 후 노후 대책을 들어봤다. 이들 각자의 목표와 여건은 달랐으나 나이와 지역에 관계없이 저금리시대에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금리시대를 사는 외국인들의 은퇴 후 노후대책에 대한 고민과 계획을 현장 중계한다.
▽리처드 마이클(65·개업의사·미국 롱아일랜드)=노후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3개의 금융상품에 가입했다. 1996년 에퀴터블 생명보험사의 연금보험에 40만달러를 넣었다. 이 돈의 65%는 확정금리 상품에 투자돼 있고 35%는 우량주펀드에 들어가 있다. 5월 말 현재 평가금액이 51만2000달러로 늘었다. 소득이 적었던 레지던트 시절에는 저소득 근로자만 가입할 수 있는 전통개인연금(IRA)에 2만5000달러를 넣었다. 100% 주식형 상품에 투자하는 상품이다. 자영업자 대상 개인연금에도 24년 전 가입했다. 현재 평가금액은 108만달러. 그동안 낸 원금은 45만달러이지만 증시 호황 덕분에 수익이 꽤 컸다. 젊어서부터 노후 대책을 시작한 셈이다. 아내는 별도로 자신 명의로 된 상품에 가입하고 있다.
▽한건석씨(56·미용기구 도매상 경영·미국 샌프란시스코)=95년부터 피델리티 성장형펀드에 5만달러를 투자했다. 99년까지 정보기술(IT)주가 급등한 덕분에 돈을 꽤 많이 벌었다. 그 후 주가가 폭락하면서 손해를 봤다. 주가가 충분히 떨어지면 다시 투자해 볼 생각이다. 하지만 은퇴가 가까워지는 만큼 성장형 펀드보다는 가치주 펀드에 투자할 생각이다. 주식투자를 중단한 뒤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한 주택을 20만달러에 매입했다. 은퇴할 때까지는 월세 수입을 받고 은퇴 후에는 그곳에서 살 작정이다. 실버타운이 인기여서 그 새 집값이 5만달러 올랐다. 월세 수입은 1300달러다.
▽알렉스 팔미어(75·전직 회계사·영국 서리)=은퇴한 뒤 투자의 제일원칙은 소득세가 면제되는 상품에 투자를 집중하는 것이었다. 중고 양로보험증권(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보험증권을 싼 가격에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상품)에 투자를 많이 했는데 성과가 좋았다. 주식시장이 괜찮을 때 펀드 몇 군데에 돈을 넣었다. 그중 하나는 6년이 지나면 적어도 원금을 보장하는 펀드였다. 1년 전부터는 ‘클로우스 브러더스’라는 인기 있는 투자회사를 통해 간접투자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들어간 후 실적이 나빠졌다. 정보통신주에 너무 많이 투자한 게 문제였다. 더 이상 주식투자는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주로 은행에 예금을 한다. 현재 금리가 3.75%로 높지는 않지만 물가상승률보다는 높고 원금은 안전하게 지켜진다.
▽버지타 옹브란트(58·여·법무부 난민국 공무원·스웨덴 스톡홀름)=정년인 65세 이후에 받는 연금은 지금 버는 돈의 60% 수준이다. 만족은 못하지만 다른 노후대비책도 있어 크게 걱정은 안한다. 자산관리 파일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점검한다. ‘오렌지 봉투’라고 불리는 연금 보고서도 다 모아두었다. 40대 초반부터 개인보험과 소액 연금보험에도 들었다. 비싸기로 소문난 스톡홀름 시내의 아파트를 40대에 장만했다. 지금 살고 있는 300만크로나(약 4억5000만원)의 아파트 이외에 북쪽에 70만크로나짜리 별장 한 채를 갖고 있다. 이 밖에 예금에 50만크로나, 국채와 주식에 각각 20만, 5만크로나씩을 분산해서 넣어두고 있다. 2000년 이후 주가 폭락으로 손해를 본 뒤 안전한 자산에 대한 투자 비중을 높였다. 투자금액이 많지 않았던 게 다행이다. 은퇴 후에는 여행도 하고 골프도 치면서 인생을 즐기고 싶다. 일할 만큼 일했고 노후생활도 충분히 준비됐다.
▽다카마쓰 이치로(33·시그나인터내셔널투자자문 사원·일본 도쿄)=금과 뉴질랜드달러에 여유자금을 50 대 50으로 운용한다. 얼마 전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지바현에 있는 주택을 2700만엔에 사들였다. 6년 전 6300만엔 하던 주택이다. 요즘 오르고 있어 꽤 많이 벌었다. 20번만 발품을 팔면 본전 뽑고도 남는 물건을 구할 수 있다. 한달 월세가 18만엔가량이니까 12∼13년 지나면 내 집을 한 채 마련하는 효과가 있다. 한때 6000만엔 하던 골프 회원권도 최근 200만엔이란 폭락시세에 샀다. 88년 입사할 당시가 버블의 절정이었다. 그때 부동산과 주식을 사고 싶어도 사지 못했는데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거품이 꺼진 시대에 투자를 시작한 우리 세대는 참 행복하다.
▽R 디트리히(52·고교 교사·독일 하이델베르크)=투자하고 싶어도 여유자금이 많지 않다. 소득의 절반가량을 각종 세금과 국가연금보험료로 낸다. 1년에 한번 해외여행할 수 있는 돈을 모으면 다행인 형편이다. 투자할 수 있는 여유자금은 소득의 15%가량. 주식투자는 너무 위험해 하지 않는다. 노후 대비용으로 지역은행에 매달 250유로(약 35만원) 정도 적립한다. 만기가 5년인데 계속 연장해오고 있다. 수익률 보장형 채권과 3, 4개 보험에도 가입해 있다. 올해 1월부터 연금보험료가 0.5%포인트 올라가고 건강보험 수가도 인상된다. 매달 150유로는 더 내야 한다. 노후에 국가가 주는 연금으로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하다. 하지만 사회가 고령화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이해한다.
▽에티엔 클레망(38·크레디 아그레콜 마케팅팀장·프랑스 파리)=재산의 40%를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한다. 독신이라서 생활비는 많이 들지 않는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자란 탓인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저축 습관이 배어 있다. 2개 생명보험 상품 외에 프랑스의 비과세 장기적립식 상품에 95년부터 돈을 넣고 있다. 주식은 장기투자를 하면 손해는 안 볼 것 같다. 노후 대비용으로 20년 이후를 내다보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 최근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파리에 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다. 파리의 집값은 대단히 비싸다. 돈을 빌려서라도 미리 사두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롭다.
▽크리스티앙 민들러(45·체신부 공무원·스위스 베른)=지금 살고 있는 집을 5년 전 5억원가량 주고 사서 집을 완전히 뜯어 고쳤다. 지금은 8억원가량 나간다. 우리로서는 이 집이 가장 큰 자산이다. 작은 농장도 하나 갖고 있다.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돈과 우리 부부가 번 돈을 모두 부동산에 투자했다. 국가연금과 직업연금(기업연금)으로 현재 월 소득의 60%는 보장받는다. 나머지는 농장을 팔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
▽레토 캠프(39·회계사·스위스 베른)=은행에서 주택자금을 대출받아 단독주택을 지었다. 국가연금 기업연금 등에 보험료를 내고 은행 빚 원리금을 갚고 나면 사실상 여유자금이 없다. 노후자금은 국가연금에서 은퇴 전 생활비의 25%, 기업연금에서 35% 등 60% 수준을 받을 수 있다. 부족한 노후생계비는 주택자금을 갚고 난 뒤 저축으로 해결할 생각이다. 국가연금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보다는 안정적이라고 들었다. 기업연금은 내가 낸 돈을 내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연간 5% 이상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
각국의 주식 및 채권 투자 현황 비교 (단위:%)국가미국영국캐나다일본독일프랑스주식과 채권형태의 재산/가처분소득1457595302520투자수익/가처분소득35.51511-775주식 및 채권/가계금융자산28.452.4-25.321.314.5단기금리5.347.385.200.323.53.46채권금리6.515.597.301.063.974.232000년 기준 자료:사회과학 저널 '경제와 사회(Economy and Society)
마이너스금리 취재팀
▼선진국 국민 노후 준비 특징 ▼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 국민들은 노후생활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본보 취재팀이 현지에서 그들을 만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점점 나빠지는 경제여건 속에서 잔뜩 불안감을 안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전략을 세우되 상황 변화에 따라 조금씩 바꿔나간다. 특히 한국과 처지가 비슷한 일본에서 주식 같은 고수익 고위험 자산에 대한 투자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둘째, 주식투자에서는 적은 금액을 매달 또는 매분기 적립해 나가는 정액분할투자법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최상의 매매 타이밍을 짚어내기 힘든 점을 피하면서 투자 위험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자녀 교육자금이나 은퇴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안정적인 장기 재무설계에 어울린다.
셋째, 직접투자보다 뮤추얼펀드 같은 간접투자상품을 주로 이용한다. 한국에서도 뮤추얼펀드 시장이 점점 넓어지고 상품 내용도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만기 1년 이내로 짧게 운영되기 때문에 수익률이 낮은 편이다. 투신운용사에 대한 불신과 높은 시장 변동성이 그 배경이다. 일반적으로 투자기간이 길수록 손실 위험이 줄어들고 수익률이 높아진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넷째, 해외펀드에 대한 높은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요즘 한국에서도 다양한 해외펀드 상품이 많이 팔리고 있다. 여기에 가입할 때는 환율 변동에 따른 투자 위험을 고려하고 수익에 대한 과세 문제도 잘 따져봐야 한다.
다섯째, 위험관리 측면에서 보험 가입은 필수인 것 같다. 개인소득세가 높은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세제 혜택이 큰 생명보험이 중요한 절세상품이다. 한국에서도 보험에 대한 인식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전에는 아는 사람 얼굴을 봐서 가입해 주던 것을 이제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보험을 신중히 선택하고 있다.
여섯째, 무엇보다 선진국 국민은 젊을 때부터 일찍이 노후대책을 서두르고 있다. 퇴직을 눈앞에 두고서야 노후생활을 걱정하는 많은 한국인과는 사뭇 다르다. 국가연금 등 사회보장제도에 노후를 의지할 수 없다는 자각이 낳은 변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에 노후를 맡길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젊을 때부터 스스로 노후대책을 세워야 한다.
은퇴 설계는 곧 인생 후반부의 설계다. 은퇴 후 생계비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와 아울러 어떤 삶을 살 것인지도 고민하는 게 바람직하다.
첫째, 은퇴 후 삶의 비전을 세운다. 은퇴는 심리적으로 큰 도전. 무료함과 상실감에 빠지지 않고 보람있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운다.
둘째, 은퇴 시기를 결정한다. 은퇴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줄여나가고 바꾸는 것이다. 일상생활 패턴의 변화를 언제쯤 가질지를 결정해야 차분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셋째, 경제적인 준비를 서두른다. 직장생활 시작과 동시에 은퇴자금 마련을 위한 저축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많은 한국인의 가장 중요한 재무 목표는 자녀 교육자금 마련이다. 반면 미국인들의 최우선 목표는 은퇴 설계다.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다. 인생의 후반전도 그 추세에 맞게 대비하는 게 바람직하다.
임계희 한국FP협회 교육분과위원장·한국 및 미국 국제공인재무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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