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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말한다]소설 '방각본 살인사건' 김탁환씨

입력 | 2003-07-18 17:18:00

작가 김탁환은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박제가의 집터가 이 근처였을 것”이라며 “지금은 백탑파가 살았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이훈구기자 ufo@donga.com


18세기 ‘모던 보이’들이 21세기 한국에 재림했다. 서울 탑동의 백탑(원각사지 10층 석탑) 근처에서 노닐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던 젊은 그들을 소설가 김탁환(35·한남대 교수)이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 것이다.

“실학파 인물들을 지금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보여 주고 싶었어요. 박지원은 시인 황지우처럼 풍채가 넉넉했지요. 거문고를 멘 홍대용은 탤런트 이병헌과 비슷했을 거예요. 농구선수 서장훈처럼 키가 큰 이덕무 옆에는 키가 아주 작은 박제가가 서 있고. 부채를 부치며 걸어가는 김홍도 옆에는 ‘보디가드’처럼 어깨에 힘을 준 백동수가 있어요. 저 종로거리를 함께 걷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김탁환의 역사추리소설 ‘방각본 살인사건’(전 2권·황금가지)에서는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을 중심으로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젊은 실학자들이 모인 ‘백탑파(白塔派)’가 주인공이다. ‘방각본…’은 작가가 10부작으로 계획한 방대한 ‘백탑파’ 연작시리즈의 첫 결실.

“박제가 백동수 이덕무 유득공 등은 함께 어울리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했지요. 이들은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자연과학 인문과학을 구분 짓지 않는 ‘종합 지식인’이었습니다. 농기구 만드는 법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으니까요.”

‘백탑파’가 정조의 파격적인 등용으로 규장각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들이 처했던 형편과 연쇄살인사건이 절묘하게 맞물리는 한 편의 지적(知的) 게임이 소설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소설의 배경은 정조가 즉위한 지 2년째인 1778년 겨울. 살인사건이 잇따라 일어난다. 단서는 모든 현장에 매설가(賣說家) 청운몽의 소설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뿐. 당시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즉 소설가를 매설가로 불렀다.

사건을 조사하던 의금부 도사 이명방은 청운몽으로부터 의외의 자백을 받은 뒤 그를 능지처참한다. 그러나 이명방은 ‘백탑파’와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청운몽이 범인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는다. 청운몽을 처형한 뒤에도 살인은 계속 일어나고 서얼 출신의 불우한 천재 김진이 ‘셜록 홈스’처럼 이명방을 돕는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살인사건의 배후에 도사린 정치적인 음모는 이명방과 ‘백탑파’를 겨누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흥미진진함에 더해 18세기의 사회상, 실학파가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집단으로서 주고받은 영향과 공유한 이상, 현실 정치에서의 한계까지 다양하고 실감나는 사회상황을 작가는 작품 속에 꼼꼼히 교직(交織)해 넣었다.

“백탑파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원형이 이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 미래에 가져야 할 태도를 알게 됩니다. 당시에는 그들을 패배자라고 했겠지만 역사에서 그들은 승리자였죠.”

과거와 현재는 단절이 아니라 반복과 연속으로 손을 맞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나, 황진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등의 전작에서 사료에 대한 충실한 탐구와 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 작가의 솜씨는 ‘방각본…’에서 한층 깊어졌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 ‘그녀’ ‘그들’ 같은 20세기 조어를 비롯해 ‘∼적’ 같은 일본식 단어가 원고지 2000장 가운데 하나도 없다. 시대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일종의 실험이다.

작가는 박지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2부 ‘열녀문의 비밀’ 및 ‘문체반정’을 다룰 3부 ‘왕과 나’를 준비하고 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