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록을 찾아서/지영재 지음/656쪽 2만5000원 푸른역사
명승(名勝)은 시심을 일게 한다. 작시가 어려우면 옛 사람의 시를 떠올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우리 조상이 그곳에 와서 지었던 시를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서정록(西征錄)’은 고려 말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1288~1367)이 중국을 여행하면서 지은 기행시집이다. 지금은 없어진 이 책을 지은이는 치밀한 고증을 통해 복원해 놓았다. 그래서 책 제목이 ‘서정록을 찾아서’다.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집’에는 270수의 시와 54수의 장단구가 실려 있다. 이 작품들이 씌어진 순서대로 ‘익재집’에 실렸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이를 위해서 작품에 등장하는 지명들과 날짜를 알려주는 단어들을 분석하고, 또 현재의 교통로와 비교해 가면서 당시의 여정을 밝히는 데 들인 노력은 놀랄 만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익재집’의 시들이 몇 개의 시리즈로 구성됐음을 알게 됐고, ‘익재집’의 시들은 그 창작 시기가 밝혀짐으로써 역사적으로 생명을 얻게 됐다.
저자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700년 전 익재 이제현의 발걸음을 되살린다. 익재가 1319년 두 번째 중국여행에서 찾은 양쯔강 하류의 자오산과 이듬해 연행길에 들른 랴오허 벌판의 왕하이산(왼쪽 작은 사진).사진제공 푸른역사
이제현은 누구인가? 그는 고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일곱 왕을 모신 정치가요, 원나라 간섭기(1259∼1356) 거의 전 기간을 살았던 시대의 증인이었다. 성리학 수용에 앞장선 대학자였으며 수많은 역사책을 쓴 역사가이기도 했다. 여기에, 이 책으로 말미암아, 당대의 여행가요 시인이라는 호칭이 더해지게 됐다. 이제현은 27세 때 처음 원나라의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 간 것을 시작으로 29세 때 쓰촨(四川)성 성도 아래의 어메이산(峨眉山), 32세 때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근처의 푸퉈산(普陀山), 36세 때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 너머에 있는 두오스마(朶思痲)까지 발길이 미쳤다. 지은이의 계산에 따르면 4만km가 넘는 거리이니 어찌 여행가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가는 곳마다 시를 지었으니, 시를 짓기 위해 여행을 했다는 지은이의 말이 과장만은 아닐 듯싶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약 700년 전 이제현의 여정을 직접 답사했다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시의 현장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예컨대, 원나라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허형의 무덤은 허난(河南)성 자오쭤(焦作)시에 있는데 ‘지금은 넓은 밭 한가운데 작은 무덤이 있고… 그 옆에는 양이 놀고 사람이 낮잠 자고 있다’는 식이다.
답사란 본디 시간과 공간을 엮는 것이다. 어떤 공간에 시간이라는 생명을 넣어주고 시간의 흐름 속에 공간의 볼륨을 더해주는 것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단순 여행과 다르다. 지은이는 그저 ‘시로써 여행을 증언’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제현과 지은이의 답사가 시간축을 형성함으로써 시공간의 틀 속에서 이제현의 시를 감상하도록 안내한다.
시 한수 한수에 친절한 해설이 붙어 있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야말로 ‘만리의 여행, 만권의 책’을 가고, 보고 한 뒤에야 이제현의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판본을 대조하여 틀린 글자를 바로잡은 것까지 합치면 이 책은 이제현의 시에 대한 훌륭한 역주본으로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한시의 번역은 물론 충실하고, 무엇보다도 중국 여행 중 열차에서 읽을 수 있을 만큼 쉽다. 다만 이제현과 그의 시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듯하므로 고려후기 역사에 대한 이해를 아울러 깊이 하기를 권한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한국사 lijoo@uo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