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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삶]전영우/나를 만나러 숲으로 갑니다

입력 | 2003-07-18 18:12:00


장마 통에 미루다가 오랜만에 찾아 나선 북한산 형제봉의 숲은 또 다른 모습이다. 장맛비 덕분인지 싱그럽고 팽팽한 나무들의 모습이 봄 가뭄에 찌들었던 때와는 영 딴판이다.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에 마음마저 가벼워진다. 땀을 식힐 겸 먼저 찬 석간수 한 모금을 마신다. 텁텁하던 입안에 차디찬 서리 불꽃이 터진다. 서리 불꽃은 식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는다. 이제 솔숲은 지척이다. 거친 숨도 어느 틈에 가라앉았다.

형제봉 북쪽 사면에 자리 잡은 솔숲은 내가 즐겨 찾는 나만의 숲이다. 이 숲은 연구실에서 20∼30분만 걸으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산모퉁이 외진 곳에 자리 잡은 덕에 심산유곡에 와 있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조용하다. 길을 잘못 든 등산객이 가끔 눈에 띄지만 나처럼 최종 목적지로 이 솔숲을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 좋다. 하긴 아름드리 낙락장송들이 모여 있는 전망 좋은 곳도 아니고,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모인 울창한 숲도 아니기에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솔숲을 빈번히 찾으면서 어느 순간 어떤 절차에 익숙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솔숲 못미처에 있는 샘에서 먼저 목을 축이고, 숲에 들어서서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솔가리가 쌓인 바닥에 편히 앉아 주변의 대상에 집중하는 일이 그것이다. 오래전부터 의례처럼 익숙해진 나만의 절차는 더럽혀진 입과 눈을 씻어내고, 몸 안에 가득 찬 속기를 소나무의 청청한 기운으로 대신 채우기 위한 노력이다.

내세울 것도 없는 그만그만한 소나무들이 모인 형제봉 솔숲을 자주 찾는 이유는 잊고 지내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잡한 도시 생활에서 침묵을 지키고 적막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다. 침묵하는 일은 내적 고요를 연습하는 길이며, 적막을 경험하는 일은 고독을 맛보는 지름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침묵과 적막은 우리들이 늘 잊고 있던 거리낌 없는 마음의 자유를 되살려 낸다. 바로 솔숲에서 체험하는 고요와 고독은 나 자신과 스스럼없이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되고, 마침내는 삭막한 나의 영혼을 치유하는 묘약이 된다. 숲을 살아 있는 병원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나는 철마다 이 솔숲에서 자신뿐 아니라 조상들도 만난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를 보면서 ‘세한도’를 떠올리며 추사의 지조와 의리를 배운다. 깜찍하고 예쁜 싹을 틔우는 소나무 모종을 보면서 ‘종송(種松)’이란 시를 떠올리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화담 서경덕의 절조와 기개를 듣는다. 그리고 가을철 숲 바닥에 떨어진 솔방울을 보고 강진 초당에서 솔방울로 차를 달이고 솔바람 소리를 벗하던 다산을 만난다.

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즈음에는 단원을 만난다. 도심의 가로수에서 찢어질 듯 우는 매미 소리가 아니라, 끊어질 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깊고도 맑은 솔숲의 매미 소리는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를 그리던 단원을 어렵지 않게 불러낸다. 기품 있는 매미 소리는 빼어난 낙락장송 아래서 생황(笙簧)을 부는 동자의 모습을 담은 단원의 그림을 연상시키고, 마침내는 맑고 고고한 소리조차 마음의 귀로 듣게 만든다. 매미 소리와 솔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취해 나는 단원을 이렇게 만난다.

흘린 땀을 식히고자 윗도리를 풀어 헤치고 숲 바닥에 퍼져 앉아 상상의 날개를 편다. 내 주변에는 어느 틈에 앉거니 서거니 한담을 즐기는 시인 묵객들이 모여든다. 거문고를 뜯거나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선비들 속에 끼여 있는 나를 발견하며, ‘더 높이, 더 많이, 더 빨리’를 요구하는 일상의 삶에서 해방된다. 북한산 솔숲은 이처럼 조상들과 나를 이어 주는 연결통로이자, 잠시나마 숨 막히는 질주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만의 해방공간이다. 오늘도 나는 등줄기를 적시는 땀을 겁내지 않고 솔숲을 찾는다.

▼약력 ▼

1951년 생.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산림생물학 박사. 저술활동과 아름다운 숲 찾아가기 행사로 숲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으며, 저서로 ‘나무와 숲이 있었네’ 등이 있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