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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포커스]물리교사서 보석디자이너로 이영미 세미성 대표

입력 | 2003-07-22 18:18:00

이영미 세미성 대표가 자신이 디자인한 보석들을 보여주고 있다. -전영한기자


“돈 많이 드는 취미 활동을 택하셨습니다.”

4년 전 홍콩에서 열린 한 국제 보석디자인 전시회. 자신이 디자인해 만든 ‘작품’들을 트렁크 가득 들고 참가한 이영미(李英美·45)씨는 주변에서 조롱 섞인 비아냥을 들었다.

당시는 이씨가 16년간의 물리교사 생활을 접고 보석 디자인·세공 업체인 세미성을 창업한 지 1년 정도 지난 때. 외국 유명 브랜드를 모방하는 대신 독자적인 브랜드를 구축하겠다며 나선 이씨에게 돌아온 것은 냉소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티파니 불가리 등 외국 브랜드의 디자인을 살짝 변형해 만들어 파는 ‘쉬운 장사’로도 버티기 어려울 만큼 국내 보석시장이 열악했던 상황. 독자적인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이씨의 소신은 ‘보석의 화려한 이미지에 현혹돼 물정 모르고 뛰어든 재력 있는 사모님’의 ‘사치스러운 자기실현 욕구’정도로 치부됐다.

“비아냥은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앞이 안 보이는 듯한 절망감에 무릎이 휘청거리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뭔가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의 이야기를 기대하며 22일 가진 인터뷰에서 이씨는 버겁게 헤쳐 온 시간들을 털어 놓았다.

“돈은 계속 들어가는데 전망은 밝아지지 않더군요. 독자적인 브랜드로 살아남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하는 회의감이 끝없이 찾아왔지요.”

유명 브랜드 디자인에 의존하거나 소매점으로 전환하는 ‘쉬운 길’에 대한 유혹과도 싸워야 했다. 맞벌이하면서 저축한 돈, 퇴직금을 다 쏟아붓고 아파트를 담보로 융자를 받아 계속 고유 브랜드 구축에 매달렸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도 밤을 새워 보석을 깎아 외국 보석전시회에 참가했다. 그렇게 한 번에 1만∼2만달러가량 자기 돈을 써가며 참가한 전시회가 30회가 넘는다.

“보석 전시회에 참가하는 게 화려한 일 같지만, 사실은 혼자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부스에 가서 전시했다 거둬들여 호텔방으로 들고 오는 식이죠. 그리고는 장렬히 깨지고 돌아오지요. 그런 모든 것들이 다 (뼈가 되고) ‘살’이 된 것 같아요.”

이씨는 창업한 뒤 몸이 불었다며 웃었다. 도저히 운동할 시간이 없더라는 것. 그래서 요즘은 장신구도 상대방의 시선을 얼굴에서 다른 곳으로 끄는 브로치를 위주로 한다. 이씨 가슴에 달린 브로치의 완만한 곡선이 눈에 띄었다. “거미다리의 곡선에서 따왔다”는 게 이씨의 설명. 이처럼 어린 시절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곤충 들풀 등에서 아이디어를 찾고, ‘벼락 맞은 대추나무’ 등 독특한 소재를 발굴해 차별을 기해 왔다.

“2년 전부터 내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조금씩 들더군요. 동남아에서 유명 브랜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방식이 성행하니까 자기 브랜드를 개발하지 않은 업체들은 경쟁력을 잃어 가더군요. 반면 고유 디자인이 있는 업체들은 ‘팬’이 생기면서 조금씩 호전됐어요. 한때 비웃던 한 동료 업계 사장이 ‘당신이 택한 길이 옳았다’고 말해주더군요.”

3년 연속 우수 산업디자인 상품에 선정되는 등 세간의 평가도 조금씩 따라붙기 시작했다. 물리교사 출신의 ‘이방인’이지만 5월에는 한국귀금속보석디자인협회 이사장에 선출됐다.

사실 교사 시절 이씨는 창의력 탐구수업으로 강남에서 꽤 알려진 선생님이었다. 강남 유명학원의 요청으로 창의력 교실을 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미술을 미칠 만큼 좋아했지요. 가정형편 때문에 안정된 직장이 보장되는 교직을 택했지만 창의적인 걸 그리고 싶다는 열망은 떠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마흔이 다가오면서 아내와 엄마, 교사가 아닌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이씨는 느닷없이 찾아온 우울감의 정체를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울었다고 말했다.

“비록 그게 나 스스로였지만, 내 내면을 위해 울어 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자체가 아늑한 안정감을 주더군요. 그러고 나니 생각과 관심이 제 스스로의 내면을 향하게 됐어요.”

그렇게 해서 이씨는 보석 디자인에 뛰어들었다. “보석 디자인이야말로 창의성 미술 물리학 등의 요소를 다 갖춘 분야라고 생각했어요.”

1996년 보석감정사 공부를 시작해 국제감정사(GIA) 자격, 주얼리가치평가사 자격을 땄다. 1998년 창업 후 하나에서 열까지 직접 처리하면서 경영을 배워 갔다. 백화점에서 임시판매대를 배정받았을 때는 직접 판매원 일을 하면서 고객들의 반응을 살폈고 밤에는 디자인에 반영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아직은 직원 4명에, 이씨 본인은 한번도 월급을 집에 가져가 보지 못한 소규모 사업이지만 2000년 법인 전환 후 세미성의 매출액은 3배 이상 신장했다.

물론 독자 브랜드로 승부하겠다는 이씨의 소신이 성공했는지를 평가하기는 아직 턱없이 이르다. “요즘도 ‘오래 버티네요’라는 이야기를 들어요. 하지만 다시 하라면 못할 만큼 버거웠던 시간들을 버텨낸 만큼 끝까지 해 볼 겁니다.”

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이영미씨는?▼

-1958년생

-이화여대 물리교육과 졸업

-서울 지역 중학교에서 16년간 물리교사 생활

-1998년 세미성 창업

-2003년 5월 한국귀금속보석 디자인협회 이사장에 선출.

-토목기술사인 남편과의 사이에 1남 1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