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2만달러 시대’를 내세우면서 우리의 정책기조가 ‘파이’를 키우는 성장 위주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를 고르게 나누는 분배 위주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파이’ 논쟁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파이’라 하면 사과파이 속에 과일 등을 넣은 후식으로만 생각하지만,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16세기까지도 파이는 속에 고기나 야채 등을 넣은 주식만을 칭하는 말이었다. 아직도 영국에는 해물 파이, 돼지고기 파이 등 파이라고 불리는 요리가 많다. 성장-분배 논쟁에서처럼 파이가 ‘나눔의 대상’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60년대 말이라고 한다.
▼'성장과 분배' 상호보완도 가능▼
그런데 과연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파이를 더 고르게 나누려고 하면 파이가 잘 커지지 않는 것일까. 다시 말해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분배를 희생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장과 분배가 상충할 수도, 상호 보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위해 분배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가장 앞세우는 논리는 고소득층이 주로 투자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로 소득이 집중돼야 투자와 성장이 더 많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규제완화를 통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부를 창출할 기회를 확대하고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를 통해 부를 창출할 동기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고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고소득층으로 소득이 집중돼도 그들이 생산적 투자보다 사치성 소비나 자본도피에 열중한다거나, 소득분배의 악화가 사회갈등을 심화시킨다거나 하면 소득집중은 도리어 성장에 해로울 수도 있다.
최근 나오는 다국간 비교를 통한 실증연구들도 주로 소득분배가 평등할수록 성장이 잘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 남미의 국가들은 엄청난 소득불평등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만 등 소득이 균등하게 분배돼 있는 나라보다 투자율이나 성장률이 낮다. 우리나라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소득분배가 많이 악화되었지만 투자는 도리어 국민소득 대비 37% 선에서 26% 선으로 급격히 떨어졌고 성장도 둔화되었다.
소위 ‘성장주의자’들은 규제완화를 해야 기업할 의욕이 커져 성장이 잘 된다고 하는데, 이것도 규제완화의 대상과 내용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얘기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완화는 경제 불안을 가중시켜 투자와 성장을 저해했다. 영국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장기적 투자보다는 단기적 이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최근 빈발하는 열차사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회간접자본이 낙후되어 전 경제가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자들은 ‘파이를 고르게 나누기 전에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규제완화,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 등의 정책을 펴 왔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성장률은 1960∼70년대의 3.2%에서 1980∼90년대의 2.2%로 오히려 떨어졌다.
이러한 성장의 저하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필연적 결과다. 자본 자유화는 투기자본의 이동을 활발하게 해 경제 환경을 불안하게 만들며 투자를 저하시킨다. 규제완화 때문에 투기로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생산적인 투자가 줄어든다. 투자가 줄어들면 수요가 위축되고 이에 따라 투자가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와 동시에 소득분배가 악화되면서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이는 투자심리를 더욱 위축시킨다. 투자의 하락은 성장의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우리엔 안맞아▼
아직도 중진국인 우리의 입장에서 성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성장촉진 정책이라고 내세워지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실제로 성장도 촉진하지 못하면서 분배만 악화시키는 ‘말로만 성장주의’ 정책이라는 것이다.
노사간 대타협과 적절한 재분배 정책을 통해 사회통합을 강화해 경제 환경을 안정시키고 투자심리를 북돋워야 한다. 또 자본시장 규제를 강화해 투기자본의 유입을 막는 등 기업이 장기적 생산적 투자를 할 수 있는 여건을 개선하고, 과학기술 및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장려해 장기적 성장여력을 키우는 등 진정한 성장촉진 정책이 필요한 때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고려대 BK21 교환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