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남매 중 막내인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때 사진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갑내기로 이제는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었다. -사진제공 강맑실
아버지,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던 지난해 추석, 제 차가 마을을 돌아 큰길로 접어들 때까지 힘없는 팔을 높이 들어 내내 흔들어주시던 모습이 여태 제 마음을 아프게 해요.
지난봄은 또 어떻고요. 모처럼 언니 집에 오셨을 때 말이에요.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게 언니 집에 도착한 저를 보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하루 종일 네가 올 때까지 저 창문 너머 길가만 바라보고 있었느니라.” “아휴, 아버지, 좋아하시는 책도 읽고 신문도 보지 그러셨어요” 하는 내 말에, “네가 온다는데 책이나 신문이 눈에 들어올 게 무어냐” 하셨지요. 그 순간 저는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행여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보일세라 거울을 외면한 채 엉엉 울고 나왔지요.
광주민주화항쟁 때는 아버지, 아버지 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모두가 학교의 공식적 승인 아래 도청 촛불시위에 참여했잖아요. 불의를 못 참는 아버지의 펄펄 살아있는 정의감과 신념 때문에 말이에요. 광주항쟁 기간 내내 총알을 뚫고 자전거로 학교를 둘러보고 오시곤 해서 저희들 애간장을 얼마나 녹이셨어요. 평생을 교육에 바친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지요. “사람에게 희망을 갖지 않는 교육은 아니함만 못하다”고 말이에요.
엄마를 비롯해 온 가족이 제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때도, 대문 밖에서 밤새 무릎을 꿇고 있던 막내 사위가 될 청년을 새벽에 불러 이렇게 이야기하셨지요. “그래, 자네가 그토록 내 딸을 사랑한다면 말리지 않겠네.” 그러면서 아버지는 엄마 몰래 모아놓았던 용돈을 노란 봉투에 넣어 그 사람 손에 쥐어주셨지요.
아버지, 세 살 적부터 저를 무등산에 데리고 다니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즈음부터는 산을 오를 때면 “맑실아, 약 준비해라” 하곤 하셨지요. 그러면 저는 엄마가 집에서 담근 포도주랑 인삼주를 수통에 채워 배낭에 넣었지요. 산에 올라 그 약을 아버지랑 단둘이 달게 마신 덕에 전 지금 술고래가 됐잖아요. 그게 다 아버지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는 걸 한참 있다 알았어요. 아버지, 곧 찾아뵐게요.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