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75세의 나이로 라틴 그래미상을 받은 셀리아 크루스가 수상식장에서 환호하는 팬들을 향해 열광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로이터 뉴시스
#1 무대
살사의 여왕 셀리아 크루스는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이렇게 외쳤다.
“아수카르(Azucar)!”
그녀의 노래에 열광하는 세상 사람들도 함께 외쳤다. “아수카르!”
아수카르는 스페인어로 설탕이란 의미다. 그녀의 사랑 노래가 설탕처럼 달콤하단 말인가? 그게 아니다. 설탕은 그녀가 수십 년간 그리워하면서 돌아가지 못한 고향땅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이다. 그녀는 몹시 그리워서, 때로는 공연히 화가 나서 “아수카르”를 외쳤다. 그러면 미국인 프랑스인 멕시코인 등은 흥분에 겨워 함께 “아수카르”를 외쳐댔다.
크루스가 고국 쿠바를 떠난 것은 1960년이었다. 피델 카스트로 공산정권이 들어선 직후 유명한 쿠바 밴드 ‘소노라 마탄세라’와 함께 멕시코 공연길에 나선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마이애미를 거쳐 뉴욕으로 왔다. 트럼펫 연주가인 새 남편과 뉴저지에 정착했지만 그곳엔 야자수도, 카리브 해로 나가는 작은 오솔길도 없었다.
“그리운 게 참 많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곳에 살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크루스는 30여년 전부터 이런 말을 했다고 주위 사람들은 회고한다.
16일 크루스는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TV들은 ‘살사의 여왕’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그녀의 노래를 틀어주었다. 크루스는 생전에 70개의 음반을 냈다. 그녀의 힘 있는 목소리와 현란한 제스처는 흥겨운 라틴음악을 세계의 인기 리듬으로 정착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그녀는 올해 그래미상을, 작년엔 라틴 그래미상을 각각 받았다.
#2 아바나
크루스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가난한 집안의 14남매 중 하나였다. 어려서 “교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지만 노래에 빠져 고모와 함께 나이트클럽을 드나들었다. 학예회에서 상을 독차지한 뒤 음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0년 아바나에서 데뷔했고 ‘살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8년 워싱턴에서 히스패닉 헤리티지 상을 받으며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나는 노래를 통해 나의 문화를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이삭 델가도라는 쿠바 가수는 2000년 크루스의 옛 노래 ‘엘 카르나발(축제)’을 다시 불러 히트를 쳤다. 델가도는 이에 앞서 크루스와 스페인에서 함께 일할 때 크루스가 쿠바의 정치문제를 한마디도 묻지 않고 음악 이야기만 하더라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회상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추모기사를 썼지만 쿠바 신문은 간단한 사망 소식만 전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는 쿠바의 음악을 미국에 알린 예술가다. 그녀는 미국 내에서 쿠바 혁명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쳤다.”
#3 마이애미
19일 크루스의 장례식에는 7만5000명이 모였다. 장소는 마이애미의 프리덤 타워 (Freedom Tower). 20세기 초 유럽에서 건너온 미국 이민자들이 뉴욕의 앨리스 아일랜드에서 이민심사를 받았듯 1960년대 쿠바의 망명자 7만5000명이 심사를 받은 곳이 프리덤 타워였다.
장례식에서 쿠바 출신 가수 글로리아 에스테판은 “셀리아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조사를 했다. 모여든 사람들은 외치고 외쳐댔다. “아수카르!”
1950년대 아바나의 나이트클럽에서 관중들을 휘어잡던 크루스의 공연장면을 기억한다는 닐라 알바레스(68)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크루스는 우리의 우상이었다”고 마이애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쿠바와 가장 가까운 마이애미에서 열린 장례식 후 크루스의 시신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4 뉴욕
훌리오 시사르 디아즈는 맨해튼 지하철의 댄서다. 루피타라는 이름의 갈색머리 인형과 살사나 룸바를 추면서 행인들의 박수를 받고 돈도 받는다. 수천명이 맨해튼 81스트리트에 있는 장례식장을 찾아 크루스에게 작별인사를 하던 21일 디아즈는 지하도에 크루스 사진을 내걸고 그녀를 추모했다. 장례식장 주변에서 사람들은 “셀리아, 셀리아”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눈물을 흘렸다. 경찰이 주변정리와 안내를 맡아야 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크루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녀는 너무 착했고, 너무 열정적이었다”며 “그런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2일 성 패트릭 성당에서 열린 영결미사에 이어 한여름 뉴욕을 뒤덮은 살사 리듬 속에 ‘겸손한 여왕’은 브롱크스의 우드론 묘지에 묻혔다.
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