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기계거리의 원조인 서울 종로5가 뒷골목. 요즘 이곳은 화려했던 옛 명성을 뒤로한 채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김미옥기자
‘붕어빵의 꿈’이 서린 곳, 서울 종로5가 음식기계거리.
그러나 이곳에 붕어빵은 없다. 대신 붕어빵 만드는 빵틀이 있다.
종로5가와 청계5가 사이 재래시장 골목에 위치한 음식기계거리엔 정감 넘치는 음식기계가 즐비하다. 붕어빵틀, 냉면기계, 떡볶이판, 호떡판, 어묵 보온통, 통닭 전기구이기계, 핫바 보온기, 만두 찜통, 뻥튀기기계, 솜사탕기계, 팝콘기계, 가마솥 등.
3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이곳은 음식기계거리의 원조. 지금은 50여개의 점포가 영업 중이다.
이곳에선 대부분 음식기계를 직접 제작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자르고 용접해 통닭 전기구이기계 하나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2, 3일. 통닭 기계 큰 것 하나는 약 85만원, 튀김통은 약 35만원, 작은 어묵통은 약 17만원, 빵틀은 15만∼20만원, 냉면 기계와 지름 1m짜리 가마솥은 10만원 정도 한다.
빵틀의 경우 주문을 받아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준다. 한 빵틀 점포에선 기린 호랑이 닭 거북 붕어 칼 총 등 각양각색의 설탕뽑기판도 눈에 띄었다.
고객은 대부분 포장마차나 분식점을 차리려는 사람들이다. 1998년 외환위기 때엔 재기를 꿈꾸는 실직자나 명예퇴직자들이 많이 몰렸다고 한다.
그러나 23, 24일 두 차례 이곳을 찾았을 때 고객을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가끔 주문받은 기계를 배달 나가는 경우만 있을 뿐 거리는 한적했다.
대를 이어 빵틀을 파는 B상회의 김주환씨(37).
“제 경력만 10년인데 요즘이 제일 어렵습니다. 음식 문화가 변하긴 했지만 외환위기 때의 10분의 1도 안 되네요.”
상인 이옥희씨(42)는 “한여름이어서 겨울에 비해 빵틀이나 어묵 보온통이 덜 팔리긴 하지만 요즘엔 손님이 너무 없다”고 하소연했다.
한 가게엔 가마솥이 쌓여 있었다. 주인에게 “가마솥도 만드느냐”고 묻자 그는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 안 나가죠. 가게 공간이 남아서 그냥 갖다 놓은 겁니다. 원래 저는 교실 난로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2000년 들어 학교에서 조개탄 난로가 사라지면서 완전히 끊겼죠. 그 전에 잘 나갈 땐 지방의 거의 모든 학교에 난로를 공급했었는데….”
얼마 전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붕어빵틀을 재떨이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 모습은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눈에는 결코 낭만적일 수 없는 광경이리라.
찬바람이 불면 붕어빵틀과 어묵 보온통을 찾는 사람이 다시 늘어날지 모르지만 ‘붕어빵의 꿈’은 분명 예전 같지 않다.
한 상인이 한숨을 내쉬고 붕어빵틀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붕어빵틀이 재떨이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