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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8월의저편 377…아메 아메 후레 후레(53)

입력 | 2003-07-27 17:26:00


“남쪽 시가지에 만주 철도의 사택이 있는데, 빨강 파랑 노랑 분홍 초록, 열두 가지 색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 양식집들이 온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집에는 다들 넓은 마루방이 있고 뜨거운 물도 나오고 난방 시설도 다 돼 있고, 문화 주택이란 말을 내지까지 유행시켰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한 남자의 눈길이 먼 어둠을 더듬듯 가물거렸다.

“…술이 깨니 이제 잠이 쏟아지는구나. 어이, 시나노마치에 있는 동향여관으로 가주게. 오늘밤은 적당히 취했으니 잠도 잘 오겠어. 술이 덜 들어가면 마음이 뒤숭숭해서 잠이 잘 안 오는데, 그렇다고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마시면 그 다음 날 아침이 말이야…저길 좀 봐라, 역이 가까워지니까 사람 사는 동네같지. 역 주변은 일본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와카사마치, 미가와마치, 나니와마치, 이세마치, 이렇게 나뉘어 있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빨간 초롱을 내건 처마가 죽 이어져 있는데, 손님도 주인도 다 일본 사람이라, 여기가 어딘가 싶을 때도 있다. 하카다인지, 오사카인지, 도쿄인지…잘 봐라, 일본인들 거리하고 똑같지?”

소녀는 이상했다. 거리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고,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커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롄은 어떤 높은 일본 사람의 머릿속에 있었던 계획을 종이에 옮겨 쓰고, 그것을 그대로 실현한 거리다. 다롄만 그런 게 아니다. 봉천도 그렇고 신경도, 일본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이 대륙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왕도낙토…식민지…대동아공영권…중국침략…오족협화…항일구국…만몽개척…삼광작전….

네 방은 여기다, 라며 가리키는 방의 문손잡이를 잡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열자, 발치에 깔려 있는 이불이 사람 모양으로 불룩 올라와 있었다. 교동 애장터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몸을 뒤척여 산이 움직였다. 소녀는 재빨리 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산을 밟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 편평한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잠은 오는데,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은 탓에 머릿속에서 색과 소리와 형태가 뒤엉켜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몸은 생각 따위 그만두고 쉬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데, 머리는 한마디 말과 영상의 꼬리를 붙들고 생각하려 했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소녀는 베개를 껴안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 사이를 뚫고 어디선가 울리는 풍금 소리가 흘러들었다.

글 유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