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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8월의저편 378…아메 아메 후레 후레(54)

입력 | 2003-07-28 17:55:00


불어라 살랑살랑 불어라 봄바람

불어라 봄바람 불어 버들가지에

불어라 불어 봄바람

얼싸 불어라 봄바람

살랑살랑 불어라

소녀는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어지간히 못 치네, 검정하고 하얀 건반 위에다 손가락을 좍 벌리고 더듬더듬 음을 찾아 치나봐…얼싸 불지 마라 봄바람 이 뜰에…어어 또 끊겼네…바람 불지 마라 바람…버들가지에…불지 마라 바람 이 뜰에…악보가 없나? 나만 한 여자애가 치고 있나 봐, 틀림없어…얼싸 불지 마라 바람 불지 말아라 바람 자꾸자꾸 끊기니까 다음 가사를 다 잊어버렸네…옛날옛날 조선이 조선 사람들의 것이었을 때 밀양 부사에게 아랑이란 딸이 있었지…목소리를 허공으로 띄워보내는 듯한 말투…할매다…아랑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유모를 친어머니처럼 따랐었단다…그런데 남몰래 아랑을 연모하던 주기란 남자가 유모를 구슬러 아랑을 영남루로 꾀어내게 했어…밀양강 위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 빛이, 강가에 흐드러지게 핀 제비꽃 깽깽이풀을 비추고 있었다…잠이 안 오는 밤 할매가 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면서 들려주었던 옛날이야기다…봄날의 아름다움에 취해 숨을 삼키고 있는 아랑의 등 뒤로 살금살금 발소리가 다가왔다. 돌아보니 유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 남자가 서 있는 거야…주기였지. 주기는 뜻을 이루려고 도망치는 아랑을 쓰러뜨리고, 저고리 고름을 풀고 치마를 걷어올렸다…그런데 아랑이 뿌리치려고 심하게 저항하니까, 울컥 화가 나서 칼을 빼들고 목을 찔러버리고 말았어…7년 전에 돌아가신 할매…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멀리서…들릴 듯 말 듯 어른거리고…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버지는 슬픔에 그만 넋이 나가버렸어…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귀신이 영남루 난간에…저는 아랑이라고 합니다, 제 한을 풀어주세요…이야기가 다 끝나면 할머니는 늘 가슴과 배를 살살 문지르며 지그시 내려다보았다…나는 할매의 눈길을 느끼면서 새근새근…가끔 눈을 살짝 뜨면…볕에 타 가뭇가뭇하고 쪼글쪼글한 목이 보이고…아아 기분 좋은 바람…할매가 부채질을 해주고 있나봐…소녀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고, 그리고 바로 잠에 빠졌다. 풍금 소리는 아직도 울리고 있다, 저 먼 어디선가, 끊겼다가는 다시 이어지는….

글 유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