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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포럼]유재천/‘주민투표制’ 성공하려면

입력 | 2003-08-03 18:22:00


정부는 지난달 28일 쓰레기소각장 설치, 읍면동의 분리 합병과 같은 지방자치단체의 중요한 현안을 해당지역 주민들의 직접투표로 결정하는 주민투표제법 시안을 발표했다. 이 법안은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9월 정기국회에 제출되며, 통과되면 내년 7월부터 발효될 계획이다.

이 같은 정부의 방침이 알려지자 신문들은 원칙적으로 이를 환영하는 한편 지자체장이나 지방의회가 이 제도를 책임회피의 도구로 남용할 가능성, 지방자치행정의 마비나 지방의회가 위축될 우려, 지역갈등의 고조 가능성 등 예측되는 부작용을 방지할 장치의 마련을 역설했다.

▼지역이기주의 병폐부터 버려야 ▼

그러나 주민투표제를 비롯해 참여정부가 앞으로 5년간 추진할 분권형 선진국가 건설에서 법률적 장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 거버넌스’의 역량이다. 지방행정, 지방예산 편성, 자치경찰제, 교육자치제, 주민투표제 등 지방분권제도는 기본적으로 주민참여가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지방분권제도의 성패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주민참여에 달려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개념이 ‘거버넌스’다. 간단히 말해 ‘거버넌스’란 정부와 같은 공공영역과 기업과 같은 민간영역이 정책결정이나 주요 사회적 관심사에 공동으로 관여해 의사결정을 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상호조정과 협동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개념의 ‘거버넌스’가 지방분권의 실현과 정착에 중요한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사회의 이해상충에 따른 갈등을 자율과 호혜, 그리고 민주적 방식으로 해소함으로써 지역사회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 지역사회의 공공영역과 기업, 이익집단, 시민단체 등 민간영역이 그러한 역량을 얼마나 잘 발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유감스럽지만 부정적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지금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집단이기주의의 무분별한 분출을 경험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맹렬하게 돌진한다. 사회 전체의 이익은 손익계산서에서 제외된다. 자기네가 살고 있는 지역 초등학교의 여유 공간 한 모퉁이에 시각장애인학교 시설을 만들려고 해도 주민들은 혐오시설이라며 맹렬히 반대하는 게 현실이다. 인도주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같은 존중되어야 할 가치나 미덕도 집단이기주의 앞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이와 같은 이른바 ‘님비’ 현상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데 지불해야 할 최소한의 비용도 낼 용의가 없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면, 우리 사회는 이미 공동체이기를 포기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지역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협력과 상호조정을 위한 행위의 준거가 되는 규범이 정립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규범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극심한 규범의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식에 토대를 둔 상호존중과 호혜의 미덕이 사라진 황폐한 사회에서 지역 ‘거버넌스’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풍토에서 진정한 의미의 주민참여가 가능한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거버넌스’의 역량을 제고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民官 정책조정역량 배양을 ▼

첫째, 각급 학교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의 규범교육을 꾸준히 실시하는 한편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루어내는 훈련은 물론 협상의 기법 등을 익힐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이 같은 교육과 훈련은 먼 길 같지만 긴 눈으로 볼 때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다.

둘째, 사회의 공론권을 형성하고 이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공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셋째, 비정부기구(NGO)들의 ‘거버넌스’ 역량을 제고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미 그러한 역량을 갖춘 시민단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강원도의 ‘한국 지방분권 아카데미’ 같은 기관이 그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

유재천 한림대 교수 · 언론학